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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생 한동훈
심규진 지음 / 새빛 / 2023년 12월
평점 :
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5.4.9.
까칠읽기 65
《73년생 한동훈》
심규진
새빛
2023.12.25.
“책을 가려읽어야 한다”는 말을 들을 적마다 갸우뚱하면서 생각해 본다. 나는 모든 말글을 몇 가지로 맞대어서 생각한다. 첫째 ‘아이’를 바라볼 적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둘째 ‘들숲메바다’를 마주할 적에 어찌해야 하는지 생각하며, 셋째 ‘사랑’이라면 어떠한가 하고 생각하고, 넷째 ‘나너우리’라는 살림빛이라면 어떠한지 생각하며, 다섯째 ‘씨앗과 꽃’이라는 숨빛이라면 어떠한지 더 생각해 본다.
어떤 아이라도 가려야 할 까닭이 없다. 들숲메바다는 어떤 숨붙이도 안 가린다. 사랑은 가리지 않고 그저 품어서 풀어낸다. 나와 너와 우리는 이때에만 좋거나 저때에는 나쁘다고 안 가린다. 씨앗은 언제나 자그마하지만 모두 다르게 빛나고, 꽃도 더 좋은 꽃이나 더 나쁜 꽃이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책은 가려읽어야 한다”는 말은 틀렸다고 느낀다. “책은 몽땅 읽어야 한다고 말해야 맞다”고 느낀다. 이른바 ‘좋은책’만 읽으려고 하면 ‘좁은눈’으로 갇힌다. 이른바 ‘나쁜책’을 아예 멀리하면 거꾸로 ‘나쁜눈’이 된다고 느낀다. 어느 책이건 가리지 않으면서 읽을 때에 비로소 ‘열린눈’과 ‘트인눈’으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글빗(비평)을 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모든 책을 고루고루 읽으면서 스스로 눈길을 틔우고 마음을 가꾸고 생각을 열어서 사랑으로 나아가는 숲빛과 들빛과 바람빛과 바다빛으로 날개돋이를 할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신문기자뿐 아니라 우리(일반독자)도 비평가도 ‘스스로 좋아하는 책’에 너무 사로잡힌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출판사’라면 ‘덮어놓고 좋아하기’ 일쑤이다. ‘좋아하는’ 마음이기에 그만 ‘좁히’면서 ‘좇아다니’느라 이웃을 모조리 ‘쫓아내’면서 스스로 ‘종(노예)’이 되고야 만다. 좋아하는 마음이 아닌, 아이곁에서 사랑을 품으면서 들숲메바다로 살림을 짓는 씨앗과 꽃을 안팎으로 고루 헤아릴 적에, 비로소 ‘사람’으로 선다고 느낀다.
책을 가려읽지 말자. 좋은책을 찾지 말자. 아니, 그저 ‘책’을 읽자. 그리고 ‘스스로 배울 책’을 챙기자. 읽기에 까다롭거나 버거우면, 더 오래 품을 들여서 천천히 읽을 노릇이다. 수월하게 읽을 만한 책이면, 되읽으면서 ‘미처 놓친 곳’이 있지 않은지 돌아볼 노릇이다.
어쩐지 요즈음에는 ‘우리(일반독자)가 읽기 수월한 책’에 꽂히거나 추켜세우는 물결이 드센 듯싶다. “읽기 수월하기에 좋은책”일 수 있을까? 읽기 수월하기에 오히려 ‘나쁜책’이지 않을까?
다시 더 생각해 본다. “가려읽는 사람은 스스로 어둠에 눈을 가리고 만다”고 할 수 있다. “나쁜책이란 없고, 책에 담긴 속내를 못 알아보는 눈이기에 얕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쓴 글부터 늘 되읽고 되새긴다. 나 스스로 나를 깨우칠 글을 쓰려고 하기에, 내가 쓴 글부터 나를 일깨우는 밑거름으로 삼으려 한다. 이러면서 나를 둘러싼 뭇사람 글을 몽땅 챙겨서 읽으려고 한다. 2025년 시골살림 눈으로 보자면, 시골에는 책집도 책숲도 아예 없거나 너무 허술한 탓에, 서울이나 큰고장에 마실을 가지 않고서는 책읽기를 널리 하기 힘들다. 그래서 바깥일로 마실을 가면 요새는 “하루 500권 읽기”를 하려고 눈에 불을 켠다. 하루 이틀 사흘 몇날에 걸쳐 ‘한 달치 책’을 몰아서 읽으며 한 달 동안 시골집에서 이 여러 책을 가만히 되새긴다.
책이 늘 둘레에 넉넉히 있는 서울사람이라면 굳이 “하루 500권 읽기”를 할 까닭이 없을 만하지만, 시골사람은 다르다. 거꾸로 보면, 시골사람은 들숲메바다가 언제나 곁에 있으니 서두를 까닭이 없이 들숲메바다를 날마다 느긋이 바라보고 헤아린다. 서울사람이라면 모처럼 들마실이나 숲마실이나 바다마실을 가면 그야말로 듬뿍듬뿍 품으려고 애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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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생 한동훈》이라는 책을 읽어 보았다. 2023년에 진작 나온 줄 알았지만 기다려 보았다. 바로읽기를 하기보다는 기다려 보고서 읽자고 여겼고, 2025년에 장만해서 읽는다. 그런데 글쓴이는 ‘팬덤’으로 쓰고 말았네. ‘팬덤’이 아닌 ‘아이 생각’이나 ‘숲 생각’이나 ‘사랑 생각’이나 ‘너나우리 생각’이나 ‘앞날을 밝힐 씨앗 생각’을 안 한 탓에 그저 어느 누가 이름·힘·돈을 얻고서 나라지기로 올라서야 한다고 여기는구나 싶다.
나라지기는 누가 해도 된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윤석열이 줄줄이 나라지기를 맡은 요즈음인데, 누가 나라지기를 맡았든 대수롭지 않다. 새 나라지기를 누가 맡아도 안 대수롭다. 우리 스스로 어떻게 꿈을 그리면서 어떻게 아이곁에 서는 어진 어른으로 살림하겠는지 밝힐 노릇이다. 그러나 《73년생 한동훈》에는 글쓴이 나름대로 한동훈이라는 사람한테서 어떤 빛과 그늘을 보았는가 하는 줄거리가 없다. 그저 한 사람을 올려세우고, 다른 사람을 깎아내릴 뿐이다.
왜 오늘날 숱한 사람들이 이쪽과 저쪽으로 갈라서 싸우겠는가? 다들 “책을 가려읽는 탓에 싸운다”고 할 수 있다. 이쪽에 서기에 이쪽 책만 읽으니 속이 좁다. 저쪽에 선다면서 저쪽 책만 읽으니 속야 얕다. 한쪽은 속좁고, 다른쪽은 속얕다.
서로 저희 쪽 책만 읽는 탓에 “왜 쟤들은 저렇게 멍청하게 굴어?” 하면서 엉뚱하게 말을 한다. ‘저쪽’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보려면 “저쪽 목소리”를 귀담아들을 뿐 아니라, 만나서 얘기해야 한다. 저쪽 목소리가 담긴 글이나 책을 아예 안 읽으면서, 더욱이 저쪽 사람들을 아예 끊고 안 만난다면, 그저 저쪽을 미워하는 말만 쏟아내면서 끝없이 싸우고 만다.
저쪽에서 이쪽을 보는 눈도 똑같다. “왜 이놈들은 이렇게 마구 굴어?” 하면서 뜬금없이 말을 한다. ‘이쪽’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보려면 “이쪽 목소리”를 귀여겨들을 뿐 아니라, 만나서 이야기할 일이다. 이쪽 목소리가 담긴 글이나 책을 아주 안 읽으면서, 덮어놓고 이쪽 사람들을 깔보고 비아냥대기만 한다면, 그냥 이쪽을 싫어하는 말만 내뱉으면서 그지없이 다투고 만다.
모든 사람은 왼손과 오른손을 나란히 써야 사람답다. 모든 사람은 왼발과 오른발을 나란히 써야 걸을 수 있다. 《73년생 한동훈》을 쓴 분은 예전에 ‘좌편향’이었다가 요새 ‘우편향’을 한다고 밝히지만, 글쓴이는 ‘진영논리’만 댈 뿐, 꿈(계획·대안·정책·비전)이 안 보인다.
우리가 ‘어른’이라면 아이들한테 차근차근 모든 빛과 그늘을 풀어내어 이야기롤 들려줄 노릇이라고 본다. 앞으로 어른으로 설 아이들이 어질고 슬기롭게 온누리를 일구는 손길과 발걸음으로 잇도록 눈을 밝혀야 하지 않을까? 어떤 ‘팬덤’으로도 새길을 열지 못 한다. ‘좋은책(팬덤)’이 사라지고서 그저 ‘사랑책’과 ‘숲책’과 ‘아이곁책’과 ‘씨앗책’일 때라야 비로소 새길을 연다.
ㅍㄹㄴ
이 책은 70년대생으로서 가장 좌편향된 세대로 꼽히는 40대인 내가 왜 보수가 되었나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했습니다. (4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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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생 한동훈》(심규진, 새빛, 2023)
정권의 탄압을 함께 겪어낸 브로맨스를 공유하고 있다
→ 나라가 눌러도 함께 두텁게 겪어내었다
→ 나라힘에 밟혀도 함께 겪어낸 바 있다
57쪽
판결을 너무 나이브하게 예단했던 것 아닌가 싶다
→ 판가름을 너무 물렁하게 여기지 않았나 싶다
→ 너무 어리숙하게 가리려 하지 않았나 싶다
60쪽
불가근 불가원의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
→ 가만히 구경해야 한다
→ 마음을 안 써야 한다
→ 흘려듣고 넘겨야 한다
437쪽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