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 숲노래 책넋

2025.3.24. 아침비하고



  이른새벽에 별이 안 보일 만큼 구름이 덮었다. 이른아침에 먼지잼이 스쳤다. 이윽고 구름이 걷히며 해가 난다. 오늘은 서울로 미리 움직이는 길이다. 어디로 갈는지, 아니 어느 책집에 들를는지 가늠하지 않았다. 집에 쌓은 책더미부터 확 줄이자고 여기며 책을 굶는, 그러나 진작 장만한 책을 주섬주섬 읽는 나날이다.


  그래도 책집에 들를 테고, 두어 곳 들르고서 글붓집을 거쳐서 일찍 짐을 풀자고 생각한다. 책더미 못잖게 글더미도 엄청나게 쌓았다.


  아침비하고 가볍게 놀았다. 우리집 봄꽃내음을 맡고서 우리집 나무빛을 담은 몸으로 움직인다. 우리집 두 아이가 배웅을 했고, 나는 옆마을로 달렸다. 등짐차림으로 달린다.


  열여덟 살부터 묵직등짐차림으로 달렸다. 고2와 고3이라는 죽음밭을 이틀마다 책집마실을 하려고 뒷배움(보충수업)과 혼배움(자율학습)을 제끼고 달아났다. 죽음밭에서 살아남으려고 달아났다. 그때는 30분쯤 쉬잖고 인천 배다리책거리까지 땀을 옴팡 흘리며 달렸다. 길삯 150윈조차 아껴서 책값으로 보탰다.


  아침에 흰새가 우리집 앞을 슥 날았다. 우리집 동박나무 옆으로 스치는 흰새는 고즈넉이 날갯짓소리조차 없이 지나갔다. 논두렁을 달려서 옆마을로 가다가 흰새를 만났다. 어느새 이 나라로 건너온 봄맞이새무리도 나란히 보았다.


  숨을 고른다. 10분 기다려서 시골버스를 탄다. 빈자리에 앉는다. 한참 달리니 이웃 면소재지에서 할매 둘이 탄다. 일부러 내 옆에 서시는데 안쪽에 빈자리가 있다. 그리 가시면 된다. 다른 빈자리를 두고서 내가 앉은 빈자리를 바라셔야 할 까닭이 없다. 오늘까지 쉰 해를 살며 돌아보건대, 나는 버스와 전철에서 1만이 넘도록 내 자리를 할매할배한테 내어주었는데 그동안 “고맙다”는 말을 100이 채 안 되게 들었다고 느낀다. 굳이 안 셌는데, 어느 날 어느 이웃님이 “어쩐지 할매할배들이 모든 자리가 이녁 자리라 여기는 듯 하다”고, “자리양보는 당연한 일이 아닌데 너무 당연히 여겨 고마움이라는 마음을 어르신 스스로 잊고 잃는다”고 들려준 적이 있다. 이 말을 듣고서 한참 돌아봤다. 곁님과 아이들하고 곧잘 이야기한다. 우리는 거저받을 수 있는 일이란 없고, 아주 작은 일부터 고맙다고 잘못했다고 반갑다고 아니라고, 우리 마음을 밝힐 줄 알아야지 싶다.


  아마 나는 이제까지 “고맙다”란 말을 10억 넘게 했을 테고, “잘못했다”는 말을 3억 넘게 했으리라 본다. 앞으로도 두 말은 가없이 내 입에서 흘러나오리라.


ㅍㄹㄴ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나한테는

모든 책집이 책숲(도서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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