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 중요한 것들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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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5.2.25.

까칠읽기 55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어슐러 K.르 귄

 진서희 옮김

 황금가지

 2019.1.29.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라는 책이름을 본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아니! 남겨둘 틈이 왜 없어! 남겨둘 틈이 없다고 여기니까 남겨둘 틈을 스스로 없앨 뿐이잖아!” 하고 한목소리로 외친다. 내가 말하기 앞서 먼저 외치는 아이들을 가만히 본다. 우리 아이들뿐 아니라 이웃 아이들도 이렇게 느끼게 마련이라고 본다. 스스로 눈빛을 안 가둔 아이라면 “남겨둘 틈이 없답니다”라는 말은 글쓴이뿐 아니라 우리 모두 쇠사슬에 치렁치렁 묶는 굴레일 뿐인 줄 알아채리라.


남겨둘 틈이 왜 없을까? 삶이 아닌 죽음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왜 틈이 없이 바쁠까? 꿈이 아니라 돈벌이에 따라서 쳇바퀴처럼 얽매이기 때문이다.


모든 마음은 그대로 모든 삶으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나는 글로 이름을 날리고 싶어.” 하고 마음을 품으면 ‘글이름팔기’를 이루되, 아무 글이나 쉽게 쓰면서 목소리만 높이는 글바치로 나아간다. “나는 글 한 줄에 사랑이라는 씨앗을 심으면서 푸른별이 푸른숲으로 피어나기를 바라.” 하고 마음을 품으면 ‘숲글살림’을 일구는 글지기로 걸어간다.


일본스런 한자말 ‘환경·생태’에는 ‘숲’이나 ‘푸른길’이라는 뜻이 서리지 않는다. ‘환경 → 터’를 가리키고, ‘생태 → 살이’를 가리킬 뿐이다. 일본은 영어 “environmental movement”를 “環境運動”으로 옮겼고, 우리는 무늬만 한글인 ‘환경운동’으로 받아들인다. 이러다 보니 예전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우리나라 ‘환경운동’은 ‘친환경’이라는 굴레에 스스로 갇힌다.


일본사람이 옮긴 일본말씨라서 틀리거나 잘못인 ‘환경운동’이지 않다. 우리나라 ‘환경운동’은 하나부터 열까지 일본것을 그대로 베끼다시피 했다. 우리 삶터를 돌아보자는 물결인데 정작 우리 눈길과 손길도 글길도 마음길도 아닌 ‘일본에 옮긴(번역한) 하늬바람(서양문화)’을 그냥그냥 오래도록 받아먹은 얼거리이다. 일본은 일본이라는 삶터를 푸르게 가꾸는 새길을 찾으려고 애썼는데, 우리는 무엇을 해온 셈일까?


이제는 우리 눈으로 보고, 우리 마음으로 가꾸고, 우리 손으로 일구고, 우리 살림으로 바꿀 때라고 느낀다. 모든 ‘환경운동’은 “터를 조금 손질하기”에서 그칠 수밖에 없다. ‘나눠버리기(분리수거)’를 아무리 잘한들, 막상 ‘터가꿈’하고도 멀다. ‘나눠버리기’도 알뜰히 하되, 먼저 ‘살림짓기’부터 할 노릇이다. “한 번 쓰고 버리는 지구”라는 이름을 내세우는 분이 무척 많은데, 언제나 이 말대로 스스로 굴레로 가두는 셈이다. “쓰고 버리는 푸른별”이 아니기를 바란다면 “스스로 살림하는 푸른별”로 우리 삶을 바꿀 노릇이고, 이렇게 하자면, ‘모든 서울(도시)’에서 떠날 노릇이고, 쇠(자가용)와 재(아파트)부터 버려야 한다.


이러면서 늘 쓰는 가장 수수한 낱말부터 ‘푸른말’로 바꿀 줄 알아야 할 테지. 늘 혀에 얹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적는 말글이 ‘푸른말’이 아니라면, ‘터가꾸기’나 ‘나눠버리기’조차 겉몸짓으로 갇히게 마련이다. ‘숲’을 말하지 않고서 ‘자연’만 말한다면, 숲을 등지고 모를 수밖에 없다. ‘배움’을 말하지 않고서 ‘학교’만 말한다면, 무엇을 배우는지 곱씹을 일이다.


그러니 모든 ‘올바른(정의로운)’ 길은 내려놓을 줄 알아야 바꾼다. 바다나 바람을 품는 말씨하고 먼 ‘바른말’이란, 오히려 서울(도시문명)을 더 키우고 늘리는 쳇바퀴로 흐른다. 오래오래 즐겁게 쓰면 되고, 오래오래 넉넉히 쓸 살림살이를 갖추면 아름답다. 오래오래 되읽을 글을 스스로 쓰면 되고, 아이들이 물려받아서 ‘어릴 적부터 읽을 책’을 우리 곁에 두면서 천천히 이 터전을 푸르게 가꿀 만하다고 본다.


‘어스시’ 이야기 첫자락은 나쁘지 않다. 다만, “나쁘지 않다”뿐이다. 가면 갈수록 쳇바퀴에 고이고 갇혀서 ‘올바른 목소리’를 밀어넣으려고 한다. 굳이 왜 이렇게 해야 할까? 참 알쏭달쏭했으나, ‘황금가지’에서 옮긴 이녁 글모음 두 자락을 읽고서 뒤늦게 알아챈다. 늙음과 죽음에 너무 사로잡혀서 두려워하는 대목을 느꼈다. 이녁 어버이가 남긴 엄청난 빛살인 《마지막 인디언》을 굳이 넘어서야 하지는 않다만, 이녁 어버이가 왜 ‘아히겨레’ 이야기를 《마지막 인디언》으로 남겨 놓았는지 여태 못 알아채고 못 깨달았구나 싶다. ‘아히겨레’는 옳거나 그르다고 가르지 않았고, 스스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길을 골라서, 그야말로 사라졌다. 그러나 아히겨레는 몸만 사라졌을 뿐, 아히겨레 넋과 숨결은 고스란히 남아서 해마다 꽃으로 피고 열매를 맺는다.


ㅍㄹㄴ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어슐러 K.르 귄/진서희 옮김, 황금가지, 2019)


대대적으로 당신이 기대한 바에 비해 당신의 손자 손녀들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 그대가 크게 바란 바와 달리 그대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14


사실 나는 기대를 품고 있지 않다

→ 막상 나는 딱히 바라지 않는다

→ 정작 나는 그리 궁금하지 않다

14


어린아이들이 여가 시간을 아주 많이 누릴 때가 있었다

→ 아이들이 아주 느긋이 하루를 보낼 때가 있었다

→ 아이들은 아주 넉넉히 뛰놀 때가 있었다

18


잎채소와 운동이 더 건강한 노년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 잎을 먹고 몸을 쓰면 늘그막에 더 튼튼할 수도 있다

24


두려움은 현명하기 어렵고 결코 친절할 수 없다

→ 두려우면 슬기롭기 어렵고 따뜻할 수도 없다

→ 두려우니 어질지 않고 포근하지도 않다

28


조심스럽고 공손한 여러분의 행동은 그들로 하여금 동일한 태도를 이끌어낸다

→ 여러분이 부드럽고 곱게 굴면 그들도 부드럽고 곱다

→ 여러분이 가만가만 얌전하면 그들도 가만가만 얌전하다

29


그 외에도 다채로운 이상한 일들이 작가로서의 내 삶에 벌어졌고

→ 이밖에 글을 쓰는 동안 온갖 재미난 일이 있었다

→ 이밖에 글을 써 오며 갖가지 놀라운 일을 겪었다

35


그녀는 자신이 고양이들을 사랑하며 잘 돌보고 있고 모두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 그사람은 고양이를 사랑하며 잘 돌보고 모두 걱정없다고 보지만

→ 그이는 고양이를 사랑하며 잘 돌보고 모두 멀쩡하다고 여기지만

43


내가 우주의 중심이 되길 원치 않는다는 말은 고양이를 곁에 두는 것이 싫다는 말이 아니다

→ 내가 온누리 한복판이 되길 안 바란다고 해서 고양이를 곁에 두면 싫다는 뜻이 아니다

55


하지만 증오와 배설물은 계속 승승장구하고 있다

→ 그런데 미움과 똥오줌은 자꾸 뻗어나간다

→ 그렇지만 불씨와 똥오줌은 그저 거침없다

64


내가 답을 줄 필요는 없지만 그는 질문의 답을 간절히 원했다

→ 내가 대꾸할 일은 없지만 그는 부디 얘기해 주기를 바랐다

→ 내가 말할 까닭은 없지만 그는 꼭 들려주기를 바랐다

65


내가 아이들의 팬레터를 정말 좋아한다고 말하면 놀라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 내가 아이들 꽃글을 참말 반긴다고 말하면 놀라는 사람이 더러 있다

→ 내가 아이들 사랑글을 참 기뻐한다고 하면 놀라는 사람이 가끔 있다

72


몇 년 후, 이따금 그 속담을 골똘히 생각하던 중에 나는 시나브로 가지다(have)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여러 가지 의미, 그 의미의 미묘한 차이를 깨달았다

→ 몇 해 뒤, 이따금 이 삶말을 골똘히 생각하다가 시나브로 가지다(have)라는 낱말에 흐르는 여러 뜻이 어떻게 다른지 깨달았다

79


수긍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도덕적 우열과 무관한 그 어떤 종류의 전투나 경쟁에서도 승리와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될 것이다

→ 받아들이기를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낫고 나쁘고를 떠나, 어떤 싸움이나 겨루기에서도 이기거나 질 적에 받아들이지 못한다

89


작가라면 스스로 유명해지기를 거절해야 한다

→ 글바치는 스스로 드날리지 않아야 한다

→ 글을 쓴다면 스스로 휘날리지 말아야 한다

97


아저씨는 노후에 유독 그 두 가지로 소일했던 것 같다

→ 아저씨는 늘그막에 으레 이 두 가지로 보낸 듯하다

→ 아저씨는 늙어서 무엇보다 이 두 가지를 한 듯하다

107


스토리가 없는 플롯이 가능하긴 하다

→ 이야기가 없는 밑감이 있긴 하다

→ 줄거리가 없는 뼈대가 되긴 하다

121


계란을 반숙하려면 찬물을 담은 작은 냄비에 계란을 넣고

→ 달걀을 설삶으려면 찬물을 담은 작은솥에 달걀을 넣고

→ 달걀을 설익히려면 찬물을 담은 작은솥에 달걀을 넣고

263


리조트들은 도시도 아니고 시골도 아니다

→ 놀이채는 서울도 아니고 시골도 아니다

→ 나들터는 서울도 아니고 시골도 아니다

312


비행운이 매일 아침 있던 곳에서 빛난다

→ 길구름이 아침마다 있던 곳에서 빛난다

→ 나래구름이 아침마다 빛난다

320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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