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 숲노래 책넋

2025.1.1. 기웃걸음



  누가 “넌 여태 어떻게 살았니?” 하고 물으면 “전 여태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하고 첫말을 읊는다. “뭘 기웃거렸는데?” 하고 되물으면 “이곳에 낄 틈이 없고 저곳에 설 자리가 없고 그곳에 갈 길이 없어서, 쭈뼛쭈뼛 어디에도 머물지 못 하는 채 떠돌고 맴돌다가 보금자리를 스스로 짓자고 생각하면서 기웃거렸습니다.” 하고 보탠다. “왜 기웃거렸어?” 하고 더 묻는다면 “제가 쥐고 싶은 종이는 누구나 저마다 스스로 삶·살림·사랑을 숲빛으로 풀어낸 이야기를 적은 종이인데, 이곳도 저곳도 그곳도 늘 저한테 다른 종이를 바라더군요. 이를테면 졸업장·자격증·신분증·추천서·은행계좌·상장을 내밀어야 들어갈 수 있다고 하니, 어디에도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 어디로 가야 할는지 기웃거렸습니다.” 하고 대꾸한다.


  이야기를 담은 종이인 ‘책’을 찾고 싶어서 온갖 책집과 책숲(도서관)을 기웃거리는데, 느긋이 오래 머물 자리를 찾지 못 했다. 이러다가 1992년 8월 28일에 인천 배다리에 있는 작은책집을 만났고, 이때부터 고등학교 2·3학년을 사흘마다 저녁에 몰래 달아나서 작은책집에서 마감까지 책읽기를 하며 삶을 버티었다. 1994년부터 서울로 깃들면서 걷거나 두바퀴(자전거)를 달려서 작은책집을 찾아갔고, 이러면서 저절로 “이 작은책집에 깃든 작은책은 우리한테 작은씨앗입니다. 작은씨앗을 그득히 품은 작은숲으로 같이 작은걸음을 할 작은이웃을 기다립니다.” 하고 속삭이면서 ‘책집마실’ 이야기를 썼고, 1998년에는 신문배달 일삯을 모아서 헌 찰칵이를 처음으로 장만해서 몇 칸씩 찍어서 남기기도 했다.


  작은책집을 언제나 끝없이 찍고 새로 찍고 거듭 찍고 다시 찍는 모습을 지켜보는 여러 이웃은 “밥먹을 돈도 없다면서 어떻게 책을 사고 필름을 사나?” 하고 혀를 끌끌 찼다. “하루에 두끼를 굶거나 이틀에 한끼를 먹더라도 사람은 안 죽어요. 그러나 오늘 이곳에서 만난 책을 안 사면 다시 만날 길이 없고, 오늘 만난 이 작은책집 모습은 바로 오늘 찍어야 비로소 이야기를 남겨요.” 하고 들려주었다.


  새책집에서는 책이 팔리는 대로 있으면 된다. 새책은 날마다 끝없이 쏟아지기에, 사람들이 많이 찾는 책을 잔뜩 들이면 그럭저럭 벌이를 삼을 수 있다. 헌책집에도 날마다 끝없이 ‘새 헌책’이 쏟아지지만, 헌책집지기는 ‘쏟아지는 새 헌책’ 가운데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책을 고르고 솎고 가린다. 헌책집지기는 날마다 끝없이 ‘책가림·책고름·책솎음’으로 온하루를 보낸다. 새책집에서 잘팔린대서 헌책집에서 잘팔리지 않는다. 책숲(도서관)에서 많이 빌린다는 책은 오히려 헌책집에서 ‘쓰잘데기없어서 버릴 책’이곤 하다.


  거꾸로 책숲(도서관)에서 버리는 책이야말로 헌책집에서 매우 잘팔릴 뿐 아니라, 없어서 못 팔기까지 한다. 새책집에서 끝내 손길을 못 타는 바람에 사라진 책이 오히려 헌책집에서 알뜰살뜰 아끼고 모시면서 책손이 기다리는 책이기 일쑤이다. 그런데 문학평론이나 출판평론을 하는 이들은 ‘새책’만 다룬다. 아마 헌책집으로 책을 보러 마실한 일이 없거나 드물 테지. 두 가지 책이 다르게 흐르는 줄 살갗으로 느낀 적이 없을 테지.


  책은 얼마나 많이 팔려야 책일까? 책은 얼마나 널리 읽혀야 책일까? 평론가와 기자라는 사람은 왜 ‘이름난’ 글쓴이와 펴냄터만 다룰까? 아니, 평론가와 기자에 앞서 우리부터 ‘이름난’ 책에 흠뻑 사로잡혔기에 그냥그냥 이 나라가 이렇게 흘러간다고 해야 옳지 싶다. 우리 스스로 ‘아름다운’ 책이 아닌 ‘이름난’ 책에 휩쓸리고 휘말리는 삶이기에, 몸소 품을 들이고 짬을 내어 작은책집으로 마실하는 일이 드물고, 작은책을 눈여겨보면서 품는 일이 드물다고 해야 옳다.


  혼자 신문배달 짐자전거를 끌거나 걸어서 책집마실을 다닐 적에는 작은책집만 찰칵찰칵 담았다. 2003년 가을에 이오덕 어른 글을 갈무리하는 일을 맡으면서 ‘이오덕 어른이 살던 멧골집’을 조금 찍기는 했지만, 그야말로 조금만 찍었다. 2006년에 오직 두바퀴(자전거)로만 온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두바퀴도 이따금 찍어 보았고, 2007년에 인천으로 돌아가서 〈사진책 도서관〉을 열면서 인천 골목길을 비로소 찍어 보았다. 2008년에 아이를 낳으며 아이와 우리 보금자리도 찍기로 했고, 2011년에 시골(전남 고흥)로 살림자리를 옮기면서 시골과 들숲바다도 찍기로 했다. 하루하루 살며 조금 더 넓게 찍는 듯하지만, 언제나 새롭고 즐겁게 찰칵찰칵 담는 빛이라면 작은책집이다. 이미 찍은 모습이란 없다. 어제 마실할 적하고 오늘 마실할 적은 해바람비가 다르고, 드나든 이웃과 책이 다르다. 책집에 12시에 깃들었으면 12시 모습과 13시 모습이 다르고, 17시 모습과 18시 모습이 다르니, 이 다른 빛과 책을 헤아리면서 새삼스레 찰칵찰칵 담는다.


  한동안 어디에도 못 깃들겠구나 싶어서 기웃거렸다면, 이제는 아이들하고 두멧시골에 깃들면서 곰곰이 마음을 바라본다. 예전에도 마음부터 바라보려고 했다. 옷차림이나 얼굴이나 몸매가 아니라, 눈을 감고서 고요히 마주하는 마음을 바라보려고 했다. 우리가 손에 쥐는 책은 ‘이름난’ 글쓴이나 펴냄터가 내놓았기에 훌륭하지 않다. 그저 삶과 살림과 사랑을 아름답게 풀어내어 숲빛으로 그리는 책이면 훌륭하다. 작은책집에는 책손이 바글바글할 수 없는데, 책을 읽고 쓰고 나누고 펼 자리라면, 모름지기 모든 책집은 자그마해야지 싶다. 서울도 부피를 확 줄여서 자그마할 적에 아름다울 테고, 시골사람도 논밭을 조금만 거느려서 조금만 지을 적에 아름다우리라 본다. 다만, 책숲(도서관)이라면 널찍해야겠지. 책숲은 모든 책을 고루 품는 노릇을 해야 하니 넓을 노릇이다. 빈자리를 둘 책숲이 아닌, 책을 둘 자리가 너른 얼거리여야 할 책숲이다. 작은책집과 너른책숲이 어우러질 적에 너랑 내가 오붓이 아름답게 만날 만하다고 느낀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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