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 숲노래 책넋
2024.11.28. 첫눈 폭탄과 늦가을비
전남 고흥에서 2011년부터 살면서 “쌓인 눈”을 거의 못 본다. 마을 할배는 이녁이 어릴 적인 1950∼60년 무렵에는 논이 꽝꽝 얼고 눈이 수북수북 쌓였다고 들려준다. 그러나 어느새 전남 고흥은 “눈없는 겨울”이기 일쑤요, 이러다 보니 포근날씨에서만 살던 적잖은 나무가 꽤 자랐고, 어쩌다가 겨울에 -5℃쯤 몇날 이으면 얼어죽는 나무가 있다.
고흥에는 눈이 없더라도, 벌교나 순천이나 장흥에는 눈이 펑펑 내리곤 한다. 그리 멀잖은 이웃 고장은 사뭇 다르다. 더구나 제주에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고흥에는 가볍게 겨울비가 오곤 한다. 부산도 이런 날씨가 비슷하다. 이리하여 2024년 11월 27∼28일 사이에 서울·경기가 눈더미에 파묻히더라도 전남 고흥이나 부산에는 가볍게 비가 내리거나 해가 쨍쨍하거나 구름이 이따금 지나갈 뿐이다.
이 나라는 아주 넓지는 않으나, 아주 작지 않다. 고장과 고을마다 날씨가 확 다르기 일쑤요, 시골인 전남 고흥만 보더라도 이쪽 면과 저쪽 읍 사이에 야트막한 멧자락이 가로놓일 뿐인데, 두 마을 날씨가 다르다. 이쪽에는 볕이 드리우고 저쪽에는 큰비가 내리기도 한다.
지난날에는 사람들 누구나 보금자리를 일구면서 마을살림을 지었다. 지난날에는 쇳덩이를 아무도 안 몰았고, 다 걸어다녔다. 걸어다니던 지난날에는 겨울눈을 기쁘게 맞이했다. 눈이 소복소복 덮어야 가을풀이 시들어서 흙으로 돌아갈 거름으로 거듭난다. 겨우내 눈이 덮어야 파리모기가 숨을 거둘 뿐 아니라, 여러 풀벌레도 몸을 내려놓고서 떠난다. 겨우내 들숲은 고요히 잠들면서 새봄을 기다린다. 겨우내 들숲은 흙갈이를 이룬다.
이제 서울·경기쯤 되면, 텃밭을 가꾸는 분이 조금 있되, 이렇게 커다란 고장은 밭도 논도 들도 숲도 아닌 그저 매캐하게 빵빵대는 쇳덩이(자동차)가 끝없이 줄달음을 치는 판이다. 사람이 아닌 쇳덩이가 멈춘다면서 바쁘고 걱정이고 고단하다. 어느새 겨울눈을 ‘겨울눈’이라 말하는 사람이 드물다. 하나같이 ‘폭설’이라는 한자말이나, 아예 ‘눈폭탄’처럼 싸움말을 붙인다. 여름을 적시는 여름비를 요새 누가 ‘여름비’라 하려나? 하나같이 ‘물폭탄’처럼 끔찍하게 이름을 붙인다.
겨울에 겨울눈을 맞이하지 못 하는 마음으로 둘레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여름에 여름비를 반기지 못 하는 살림으로 이웃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겨울눈을 겨울눈이라 말하지 않는다면, 어떤 글을 쓸까? 여름비를 여름비라 이야기하지 못 한다면, 어떤 책을 읽을까?
모름지기 겨울에는 눈을 안 치워야 맞다. 쌓인 눈을 그대로 두면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라고 두어야 옳다. 눈더미를 그대로 두어야 흙이 살고 땅이 숨쉬고 하늘이 맑고 숲이 푸르고 바다와 냇물이 정갈하다. 서울·경기에서 길바닥에 뿌리는 끔찍한 죽음물로 눈더미를 녹일는지 모르나, 이 때문에 들숲바다가 몽땅 허덕이고 죽어가는데, 이 얼거리를 읽어내거나 알아보는 서울이웃은 얼마나 있을까? 우리는 오늘 어떤 글을 쓰고 어떤 말을 하며 어떤 책을 읽는가?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