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 마을책집 이야기


큰걸음도 작은걸음도 아닌 (2023.9.15.)

― 인천 〈아벨서점〉



  한꺼번에 다 푸는 일이 있을 테지만, 삶이란 하나씩 풀어가며 조금씩 배우면서 천천히 눈을 뜨기에 즐겁습니다. 겨울이 끝나는 첫봄에 모든 꽃이 한꺼번에 핀다면, 한봄하고 늦봄에는 아무 꽃이 없고, 첫여름이며 한여름이며 늦여름에도 아무 꽃이 없으며, 첫가을하고 한가을하고 늦가을에도 아무 꽃이 없을 테지요.


  그러나 꽃은 철 따라 새롭습니다. 첫봄꽃하고 한봄꽃이 다르고, 첫가을꽃하고 늦가을꽃이 달라요. 겨울을 앞둔 철에 피는 멧노랑(산국)이나 억새는 느림보가 아닙니다. 제철에 빛나는 아름꽃이에요. 어느 모로 보면 그냥 ‘느림꽃’이라 할 만합니다. 한자말로 가리키는 ‘대기만성·지적장애·발달장애’는 우리말로 ‘느림별’로 담아낼 만합니다.


  여태 걸어온 길을 으레 돌아보는데, 하나부터 쉰까지 느림보입니다. 열네 살에도 열일곱 살에도 배움터를 그만두지 못하다가, 스물과 스물한 살에도 미루다가, 싸움터(군대)를 다녀오고서야 스물셋 막바지에 드디어 배움터를 그만두었는데, 여덟 살 때부터 배움터를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배움터만 가면 늘 꾸중을 들으며 얻어맞았거든요. 신나게 놀며 즐겁게 수다를 떨고 싶지만, 놀면 논다고 때리고 말을 더듬으면 더듬는다고 괴롭히는 그곳은 ‘학교’가 아닌 ‘감옥’이었다고 느껴요.


  인천 〈아벨서점〉에서 저녁나절에 ‘말꽃수다’를 폅니다. 굳이 어렵게 ‘어원강의’라 읊고 싶지 않습니다. 저뿐 아니라 누구나 느릿느릿 느슨하게 찾아내고 알아낼 수 있는 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굳이 열 살이나 스무 살에 깨달아야 하지 않습니다. 서른 살이나 마흔 살에 못 깨달아도 됩니다. 쉰 살이나 예순 살에도 아직 어리석을 수 있습니다. 일흔 살이나 여든 살이어도 철없을 수 있어요.


  안 서두르면 스스로 빛나요. 모든 꽃이 2∼3월에 피어나야 하지 않듯, 어느 꽃은 11월뿐 아니라 12월이나 1월에도 피듯, 우리는 아흔 살에 비로소 삶을 알아보고서 깨달아도 아름답습니다. 아흔아홉 살까지 철딱서니없이 굴다가 온살(100살)에 이르러 깨달아도 사랑스럽습니다.


  풀며 또 풀며 자꾸 풀면서 한 발씩 나아가는 오늘이지 싶어요. 큰걸음도 작은걸음도 아닌, 가만히 마을걸음을 디디면서, 부산도 전라도도 서울도, 저마다 소근소근 이야기꽃을 피우는 ‘살림자취’를 ‘역사’로 알아보고 바라보는 눈을 뜰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새치기하지 맙시다. 기다립시다. 사이에 끼지 맙시다. 언제나 스스로 빛납시다. 인천에서 서울로 올라가지 않고, 서울에서 인천으로 내려오지 않습니다.


ㅅㄴㄹ


《희망은 있다》(페트라 켈리/이수영 옮김, 달팽이, 2004.11.15.)

《밥의 위기 생명의 위기》(이병철, 종로서적, 1994.1.30.)

《야생 거위와 보낸 일 년》(콘라트 로렌츠/유영미 옮김, 한문화, 2004.1.6.)

《77人 에세이 山》(송지영 외, 평화출판사, 1977.12.15.)

《울고 들어온 너에게》(김용택, 창비, 2016.9.9.)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허만하, 솔, 2002.12.10.)

《이야기 서양 고사성어》(남경태, 새길, 1994.5.26.)

《포도밭 편지》(류기봉, 예담, 2006.8.28.)

《동물들의 사회생활》(리 듀거킨/장석봉 옮김, 지호, 2002.6.25.)

《잡초는 없다》(윤구병, 보리, 1998.5.15.)

《울지 않는 늑대》(팔리 모왓/이한중 옮김, 돌베개, 2003.7.14.)

《까마귀》(보리아 색스/이한중 옮김, 가람기획, 2005.10.10.)

《인천 외래식물도감》(송홍선, 풀꽃나무, 2008.11.20.)

《위대한 늑대들》(어니스트 톰슨 시튼/장석봉 옮김, 지호, 2004.2.27.)

《어머니! 좋은 물을 마시고 계십니까》(마쯔시따·나까무라/조태동 옮김, 수문출판사, 2003.8.5.)

《百犬譜》(편집부 엮음, 天津 人民文化出版社, 1994.4.)

《알래스카 이야기》(호시노 미치오/햇살과나무꾼 옮김, 논장, 2013.2.20.)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