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 마을책집 이야기
밤늦게 (2023.9.15.)
― 인천 〈나비날다〉
어떤 일이건 우리가 배워야 하기에 찾아든다고 여깁니다. 어린날 겪은 숱한 일도, 어른이란 자리에 서서 아이들하고 살림을 가꾸는 오늘도, 늘 새롭게 배울 일이 있어서 마주한다고 느껴요. 때로는 가시밭이고, 때로는 자갈밭입니다. 아직 꽃밭이나 숲밭 같은 자리는 드문데, 팍팍하거나 가파르게 지나가는 길이란, 이 밑바닥에서 숱한 이웃을 마주하면서 낱말책에 말글을 어떻게 싣고 엮고 추슬러야 하는지 다시 배워야 한다는 뜻이지 싶어요.
그런데 밑바닥이 따로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름으로는 ‘가난’이나 ‘가멸’로 가르기는 하지만, 다 한끗일 뿐이거든요. 마음은 좁고 초라하면서 돈만 많은 사람을 ‘가멸’로 못 느끼겠어요. 돈은 없고 옷이 추레하다지만 마음이 넉넉하며 밝게 웃고 맑게 말하는 사람을 ‘가난’으로 못 느끼겠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쉴새없이 보내고서 드디어 밤을 맞이합니다. 여름이 끝난 밤에 인천 배다리를 문득 휘 거닐다가 〈나비날다〉에 들어서서 짐꾸러미를 내려놓습니다. 온몸은 땀으로 젖었고, 앞가방도 등가방도 땀범벅입니다. 시골집으로 돌아가면 가방도 죄다 빨아야겠습니다.
작은책집을 꾸리는 분도, 작은가게를 일구는 분도, 작은집에서 조촐히 살림을 돌보는 분도, 새벽부터 밤까지 쉬잖고 일을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일을 합니다. 다 다른 사람은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르게 일하고, 일삯도 다 달라요.
밑일삯(최저임금)이란 뭘까요? 책 한 자락은 돈을 얼마쯤 치르고서 사읽어야 스스로 배움밭 노릇을 할까요? 책을 써내거나 펴내는 일꾼은 돈을 얼마쯤 벌 때에 가슴을 펴면서 기지개도 켤 만할까요?
저는 ‘뜻’은 굳이 안 읽으려고 하지만, 재미없거나 따분하거나 시시하구나 싶은 일이나 책이나 말이라면 애써 ‘뜻’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오늘날 숱한 책과 글과 일은 ‘뜻’을 앞세우더군요. ‘살림’이나 ‘사랑’이 없는 채 다들 ‘뜻’만 거룩하다고 여기면서 높이 외치는구나 싶어요.
우리가 하는 일이 사랑이라면 그저 사랑인데 왜 ‘뜻’을 소리높여 알려야 하는지 아리송합니다. 우리가 하는 살림이 숲빛이라면 그저 푸른데 구태여 ‘뜻’을 드높이거나 퍼뜨려야 하는지 알쏭합니다. 저마다 오늘 하루 배우고 누리고 나누며 일군 보람을 나누면 넉넉하구나 싶어요.
그나저나 하루키 씨 새책은 19500원이고, 글씨가 크고 줄틈이 듬성듬성입니다. 쓰게 웃습니다. 마른수세미 하나는 6500원이로군요.
ㅅㄴㄹ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무라카미 하루키/홍은주 옮김, 문학동네, 2023.9.6.)
#街とその不確かな壁 #村上春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