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 숲노래 마음노래

수다꽃, 내멋대로 59 그만두다



  쉰 살에 이른 나한테 어느 분이 묻는다. “어릴 적에 어떻게 보내셨어요?” 나는 어린날을 늘 떠올리지만 늘 생각조차 않는다. 앞뒤 어긋난 말 같지만, 늘 두 가지를 나란히 한다. 어제하고 오늘하고 모레는 늘 같기에, 오늘을 바라볼 적에 늘 모레가 나타나면서 어제가 피어난다. 어릴 적에 무엇을 하며 놀거나 일하거나 꿈을 그렸는지 바로 되새기면서, 오늘 무엇을 하며 놀거나 일하거나 꿈을 그리는지 곧장 생각하고, 이동안 모레에 무엇을 하며 놀거나 일하거나 꿈을 그리는지 어느새 눈앞에서 하나둘 본다. “저는 어린날에 늘 얻어맞으면서 살았어요. 막말(욕)도 오지게 들었어요. 어린날에 대여섯 해쯤 몹쓸짓(성폭력)에 시달리기도 했어요. 어린날에는 ‘죽고 싶다. 죽어야겠다’는 마음이 늘 감돌았어요. 날마다 ‘죽고 싶다. 죽어야겠다’ 하고 울지 않았어요. 모든 때, 그러니까 1분 1초 모든 때에 ‘죽고 싶다. 죽어야겠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이런 마음일 적마다 둘레에서 ‘그럼 내가 널 죽여 줄까?’ 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보는 사람도 있고 못 보는 사람도 있는데, 우리 둘레에는 온갖 깨비(귀신)가 늘 도사려요. 우리가 스스로 엉큼하거나 어둡게 스스로 죽일 적에는 바로 이 깨비가 속삭이면서 홀리려고 하지요. 깨비가 나를 죽여 주겠다고 할 적마다 ‘아냐! 난 죽을 수 없어! 난 죽지 않겠어!’ 하고 외쳤고, 이때마다 깨비는 빙그레 웃으면서, 또는 차가운 낯빛으로 사라졌어요. 워낙 날마다 집에서도 마을에서도 배움터에서도 얻어맞고 막말에 시달리는 나날이었는데, 열다섯 살에 이르러 드디어 이런 굴레를 스스로 떨치는데, 열다섯 살까지 굴레살이를 하면서도 ‘굴레’라고 여기지 않았어요. 집 안팎에서 저를 모질게 괴롭히고 못살게 굴 적마다 ‘내 몸은 내가 아니야. 내 몸은 내가 입은 그릇이야. 그런데 너희가 이 그릇을 아무리 들볶고 괴롭히고 장난을 치더라도 그릇은 다치지 않아. 너희는 껍데기를 만지작거릴 뿐이거든.’ 하고 여기면서 지나갔어요. 견디지 않았습니다. 버티거나 참지 않았어요. 어린날에는 ‘유체이탈’이란 말을 몰랐는데요, 어린날에 시달리고 들볶이는 동안 ‘몸벗기(유체이탈)’를 했어요. 날마다 뻔질나게 했습니다. 얻어맞거나 막말을 듣거나 몹쓸짓에 시달릴 적마다, 제 넋은 몸을 벗어났어요. 저를 괴롭히는 이들 머리 위로 붕 떠올랐어요. 그들은 제 넋이 몸에서 나와 하늘에 붕 뜬 줄 하나도 모르더군요. 저는 하늘에 뜬 채 그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곰곰이 지켜보았어요. 제가 아무리 맞아도 그닥 대꾸도 없으니, 또 멀쩡하게 웃고 뛰놀면서 사라지니, 이튿날에도 또 괴롭히기 일쑤이지만, 언제나 몸벗기를 하면서 어린날을 보냈어요. 저는 어린날에 책을 조금 읽기는 했지만, 책을 읽을 틈이 없었습니다. 어머니 곁에서 집안일을 돕고 심부름을 하고, 어린배움터와 푸른배움터에서 쏟아붓는 무시무시한 짐더미(숙제폭탄)를 붙잡고 울었어요. 밤새워도 다 할 수 없을 만큼 짐더미를 쏟아붓고는, 짐더미를 다 못 했다면서 길잡이(교사)란 놈들이 몽둥이에 따귀에 발길질을 일삼았답니다. 제 어린날은 이렇습니다.” 겉몸을 휘젓거나 괴롭히는 이들은 아마 사랑받은 일이 없다고 여기리라 본다. 그들한테는 떡 하나를 더 주어야 옳다고 느낀다. 예부터 미운아이 떡 하나 더 준다고 하는 말은, 사랑받지 못 한 이웃과 아이가 “넌 늘 사랑받는 삶이요 숨결이란다” 같은 이야기를 온몸으로 맞아들이면서 배울 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놓는 조그마한 손길을 나타낸다고 본다. 미운아이를 손가락질하거나 때리거나 굶기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바로 싸움(전쟁)이다. 싸움은 나쁘지 않지만, 싸움만 일삼거나 싸움으로만 치닫는다면, 그들뿐 아니라 우리부터 사랑을 잊고 잃는다. 아마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참답게 배우고 슬기롭게 우리 아이들한테 물려줄 씨앗을 품으려고 ‘어린날’을 보냈다고 느낀다. 그러니까 ‘죽고 싶다’는 마음을 그만두자마자 오직 꿈으로 걸어가는 밤길을 보았고, 밤이란 어두운 때가 아닌, 밤이란 별빛으로 밝고 아름다운 사랑길인 줄 알아차렸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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