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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미래입니다 ㅣ K-포엣 시리즈 24
황인찬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2년 1월
평점 :
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4.10.31.
까칠읽기 47
《여기까지가 미래입니다》
황인찬
아시아
2022.1.28.
《여기까지가 미래입니다》를 읽었다. 82쪽짜리 가냘픈 꾸러미이다. 가볍게 읽으라는 뜻일 텐데, 글님은 ‘젊은글꾼’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이 너무 드세구나 싶다. 뭔가 ‘새롭게’ 글결을 풀어야 한다고 여기면서, 글다듬기에 지나치게 매였다고 느낀다. 어떤 이야기를 담을는지 살피기보다는, ‘다른 글결’을 선보이려는 마음이 앞선 탓에, 온갖 옮김말씨하고 일본말씨를 뒤섞는다.
한글로 적기에 ‘우리글(한국문학)’이지 않다. 한글로 적으면 그저 “한글로 적었을” 뿐이다. ‘빠리바게트’나 ‘베스킨라빈스’는 무늬는 한글이되 우리글도 우리말도 아니다. “밤의 연남동은(28쪽)”은 어느 나라 말씨일까? 그냥 일본말씨이다. 우리말씨라면 “밤에 연남동은”이나 “밤 연남동은”이나 “연남동 밤은”이나 “연남동은 밤에”이다. 우리말씨를 일부러 버리면서 옮김말씨에 일본말씨를 쓰기에 새롭지 않다. 이런 말씨는 이미 사슬살이(일제강점기)를 하던 무렵 확 들어와서 쫙 퍼진 적이 있다.
“나는 그게 원래 그가 말하려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10쪽)”는 어느 나라 어느 글꾼 말씨일까. 중학교 영어 교과서 ‘직독직해’ 글결일 뿐이다. 그러나 황인찬 씨뿐 아니라 한강 씨도 이런 글결이다. 오늘날 이 나라 젊은글꾼은 으레 이런 글결이다. 겉으로 보면 한글이지만, 막상 읽다 보면 아무런 알맹이가 없이 허울을 붙인 짜임새라고 느낀다.
굳이 알맹이를 담아야 하지 않을 수 있다. 따로 줄거리를 안 짤 수 있다. 애써 이야기를 안 들려주어도 된다. 그런데, 글이란 말을 옮긴 무늬이고, 말이란 마음을 담은 소리이다. 마음이란 삶을 담는 그릇이다. ‘글 = 말 = 마음 = 삶’인데, 알맹이·줄거리·이야기가 없이 겉보기로만 ‘글’을 꾸민다면, 이때에는 스스로 삶을 안 지으면서 보냈다는 뜻이다.
손수 설거지를 하고, 손수 비질과 걸레질을 하고, 손수 밥을 짓고, 손수 바느질을 하고, 스스로 집과 마을을 걷고, 스스로 좀더 멀리 걸어다니고, 스스로 책집마실을 다니고, 스스로 여러 책집에서 책꽂이를 돌아보면서 스스로 온갖 낯선 책을 집어들어서 읽을 뿐 아니라, 스스로 낱말책(사전)을 천천히 한 낱말씩 새로 읽어 본다면, ‘무늬글’은 쓸 일이 없다. 삶을 먼저 지으려는 매무새가 없는 탓에, 마음도 말도 글도 그저 꾸미고야 만다. 삶을 언제나 스스럼없이 짓는 하루라면, 글다듬기를 할 까닭이 없이 글님 하루를 돌아보고 되새기고 곱씹는 빛살을 살포시 담았을 테지.
ㅅㄴㄹ
중요한 사실에 대해 내게 말해주었지만, 나는 그게 원래 그가 말하려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 (파워/10쪽)
밤의 연남동은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사람 아니라 개도 많지만 사람은 더욱 많습니다. (너무 큰 소리로 웃지 말자/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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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미래입니다》(황인찬, 아시아, 2022)
온종일 산을 헤맸다 그것은 살아 있을 적의 일은 아니고
→ 온하루 멧골을 헤맸다 살았을 적 일은 아니고
→ 내내 메를 헤맸다 살던 일은 아니고
8쪽
그저 내 꿈속에서의 일
→ 그저 꿈
→ 그저 꿈에서 본 일
8쪽
새 한 마리가 울기 시작하고 온사방에서 새들의 울음이 가득해진다
→ 새 한 마리가 울자 곳곳에서 새노래가 가득하다
→ 새 한 마리가 우니 여기저기에서 새노래가 퍼진다
9쪽
살아 있는 것들의 대합창 속에서 나만 빼고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 살아숨쉬는 떼노래인데 나만 빼고 모두 하나라고 느낀다
→ 싱그러이 큰노래인데 나만 빼고 하나
→ 푸르게 노래물결인데 나만 빼고 모두 잇는다
9쪽
오른쪽으로는 남극의 바다가 펼쳐져 있다
→ 오른쪽으로는 마끝바다
→ 오른쪽으로는 마녘끝 바다
14쪽
왜 거리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인지는
→ 왜 거리 한가운데 서는지는
→ 왜 거리 한가운데 있는지는
17쪽
빈 의자들이 가득해져서 민망해지는 주말의 오전입니다
→ 빈 걸상이 가득해서 부끄러운 끝이레 아침입니다
→ 빈 걸상이 가득해서 남사스러운 이레끝 아침입니다
19쪽
잎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아래로 처지는 나뭇가지들
→ 잎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처지는 나뭇가지
19쪽
두려워져서 나는 앞을 향해 걷는다
→ 두려워서 앞을 보며 걷는다
→ 난 두려워 앞으로 걷는다
22쪽
타종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 쇠북빛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 쇠북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24쪽
책상 위에 놓인 것은 쓰다 만 소설 뭉치와
→ 글자리에는 쓰다 만 글뭉치와
→ 자리에는 쓰마 만 글뭉치와
26쪽
백색의 말을 타고 천천히 트랙을 돌 것이라고 했다
→ 흰말을 타고 천천히 달림길을 돌리라 했다
→ 하얀말을 타고 천천히 자리를 돈다고 했다
27쪽
오전의 연남동은 생각보다
→ 아침 연남동은 생각보다
→ 연남동은 아침에 생각보다
31쪽
그렇게 시를 쓰기 시작하면 이미 시를 다 쓴 것 같다
→ 이렇게 노래를 쓰면 이미 다 쓴 듯하다
→ 이렇게 글을 쓰면 이미 다 썼지 싶다
35쪽
길어진 그림자
→ 긴 그림자
→ 길쭉한 그림자
39쪽
두 그루의 나무
→ 두 그루 나무
→ 나무 두 그루
43쪽
두 개의 발이 걷고 있다
→ 두 발이 걷는다
46쪽
복도는 너무 서늘해서 오히려 안심이 된다
→ 난달은 너무 서늘해서 오히려 마음 놓는다
→ 골마루는 너무 서늘해서 오히려 즐겁다
48쪽
내가 거기서 발견하는 것은 유폐와 유폐의 예감뿐이다
→ 나는 수렁을 보거나 수렁에 잠기겠다고 느낄 뿐이다
→ 나는 굴레를 보거나 굴레에 갇히겠다고 여길 뿐이다
56쪽
모든 대상은 회색이다
→ 모두 잿빛이다
→ 모든 숨결은 잿빛이다
59쪽
이 짧은 글 속에서 계속 반복되고 번복되며
→ 이 짧은 글에서 자꾸 되풀이하고 뒤집으며
→ 이 짧은 글에 또 쓰고 뒤엎으며
61쪽
가장 자주하는 생각은 아름다움에 대한 나의 적개심을 어떻게 멈출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 아름다움이 미운데 어떻게 이 마음을 멈출 수 있는지 자주 생각한다
→ 아름다우면 싫은데 어떻게 이 마음을 멈출 수 있는지 자주 생각한다
69쪽
그저 그렇게 삶이 지속될 뿐이다
→ 그저 그렇게 살아갈 뿐이다
→ 그저 그렇게 살 뿐이다
70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숲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