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빛 / 숲노래 책읽기
2007.4.5. 삼선동
나는 서울사람이 아니기에 서울에 어느 마을이 있는지 잘 모른다. 작은아버지 두 분이 서울에서 살기에 어릴 적에는 한가위나 설이면 작은아버지한테 찾아가곤 했지만, 서울은 인천에서 참 멀고, 너무 시끄럽고, 너무 빽빽하고, 너무 숨막히고, 너무 답답했다. 이렇게 말하면, “인천부터 서울이 멀면, 부산부터 서울은 가깝나?” 하면서 핀잔을 할 분이 많으리라. 그런데, 인천에서 서울을 오가는 길보다, 대전에서 서울을 오가는 길이 빠르기도 하다. 1994년에 서울 이문동 한국외국어대학교에 들어갔는데, 그때 대전에 사는 동무가 서울 이문동에서 서울역을 거쳐 대전에 있는 저희 집에 닿는 겨를보다, 내가 서울 이문동에서 전철을 타고 인천으로 건너간 뒤에, 인천 시내버스로 갈아타서 우리 어버이 집에 닿는 겨를이 한참 늦었다.
그러니까 서울역에서 부산역까지 빠르게 기차로 달리면, 오히려 인천보다 먼저 닿을 수 있다. 그만큼 인천하고 서울은 “얼핏 가까워 보여도 대단히 먼 사이”라고 여길 만하다.
서울 골목골목을 두 다리로 누비면서 헌책집을 하나씩 찾아보려고 할 적에 어느 날 어느 책이웃님이 “삼선동에도 헌책집 많습니다.” 하고 알려주었다. “삼, 뭐라고요?” 하고 되물었다. 서울내기가 아니니 ‘삼선동’이란 이름을 바로 알아듣지 못 했다.
서울 혜화동이 어디인지, 돈암동과 보문동은 또 뭔지, 이화동이나 숭인동이나 창신동은 또 뭔지 골이 아팠다. 그렇지만 마을 한켠에 깃든 작은 헌책집을 한 곳씩 찾아보고 꾸준히 드나드는 동안 천천히 마을이름을 사귀었고, 한 해 세 해 다섯 해 열 해 남짓 흐르는 동안 서로 다른 마을이 어떻게 맞물리면서 어울리는지 시나브로 알아차렸다.
삼선동이라는 곳에 여러 헌책집이 없었으면 그곳 이름을 귀여겨들을 일이 없었으리라. 굳이 그 마을을 찾아갈 일도 없었으리라. 삼선동에 헌책집 〈삼선서림〉이 새로 연 뒤에는 퍽 자주 삼선동을 찾아갔다. ‘삼선교’라는 다리를 다달이 걸어서 건넜다. 여름에는 ‘낙산’이라는 곳에 책짐을 이고 지고 올라가서 해바라기를 하며 책을 읽었다. 이렇게 대여섯 해를 삼선동하고 사귀던 어느 날 〈삼선서림〉이 깃든 오랜 집터를 큼지막하게 찰칵 찍었다. 이때까지 둘레에서는 ‘삼선교 나폴레옹 빵집’이라고 하면 알더라도 ‘삼선교 헌책집’이라고 하면 모르기 일쑤였다.
그런데 〈삼선서림〉이 닫았다. 작은책집이 둥지를 튼 큰집을 찰칵 찍었되, 이 빛그림을 삼선지기님한테 건네지 못 했다.
책집을 닫고서 어디로 떠나셨을까. 책집을 닫으면서 어떻게 지내실까. 삼선지기님은 “나도 책을 좋아하다 보니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다들 가난한데, 가난한 책벌레한테 책값을 받기가 늘 미안했어요.” 하고 말씀하곤 했다. “이 책이 귀하잖아요? 5000원에 사온 책인데, 5000원만 받을게요. 그런데 더 싸게 주지 못 해서 어쩌지요?” 하는 말씀도 곧잘 했다.
작은 헌책집이 커다란 집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집을 통째로 헐어서 뭘 더 크게 올려세운다고 하더라. 삼선동에 있던 마지막 헌책집이 사라진 뒤부터, 수더분한 책집지기님을 더 만날 수 없던 뒤부터, 이제 삼선동 쪽을 바라보기가 어렵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