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빛 / 숲노래 책읽기
2024.5.30. 새로 배운다
틈틈이 《유리가면》을 되읽는다. 《유리가면》뿐 아니라 숱한 책을 되읽고 거듭읽고 새로읽는다. 낱말책에는 ‘되읽다’ 하나는 올림말로 있으나, ‘거듭읽다·다시읽다·새로읽다·새겨읽다’ 같은 낱말은 올림말로 없다. 나는 낱말책에 아직 없는 이런 여러 낱말을 일부러 쓴다. 참말로 ‘거듭읽기’를 하고 ‘다시읽기’를 하며 ‘새로읽기’를 하니까. 그러고 보면, 이 삶을 고스란히 말씨로 옮긴다. 말씨 하나는 풀씨처럼 매우 작은데, 작은 말씨요 풀씨이기 때문에 마음도 들숲도 푸르게 가꾸는 밑바탕이다. 왜 자꾸 되읽고 거듭읽고 새로읽는가? 되읽으면서 새로 배우기에 자꾸자꾸 읽고 또 읽는구나 싶다. 거듭읽으며 새삼스레 배운다. 새로읽으며 사랑을 배운다. 줄거리 때문에 책을 읽는 일이란 아예 없다. 허울뿐인 자랑책(베스트셀러)을 읽든, 비록 제대로 읽히지 못한 채 사라진 아름책을 읽든, 늘 한 가지 마음이다. 이리하여, 생각에 잠긴다. 사람들은 왜 허울스러운 자랑책을 더 많이 읽는지 곱씹는다. 사람들은 왜 아름책은 눈여겨보지 않는지 되새긴다. 사람들은 왜 ‘천만 관객 영화’처럼 ‘백만 부 베스트셀러’에 오히려 쏠리는지 돌아본다. 사람들은 왜 ‘초판 300부 절판’이 되고 만 아름책에는 도리어 손도 눈도 마음도 기울이지 않는지 헤아려 본다. 그런데 책이 아닌 어린이로 마주하면 “아하, 그렇구나.” 하고 확 와닿는다. 어린이도 어른도 겉모습으로 따지거나 잴 수 없다. 모든 다 다른 사람이 아름답게 사랑이다. 모든 책도 몇 자락이 팔렸거나 읽혔는지 대수롭지 않다. 아직 알아보는 사람이 적은 책이더라도, 신문방송과 비평가 추천으로 날개돋히는 책이더라도, 속빛은 늘 그대로 흐른다. 겉으로 드러나는 허울에 깃든 마음을 읽어 본다. 속에서 감도는 사랑을 짚어 본다. 나는 어떻게 하루를 살아가겠는가? 누가 알아보아 주기를 바라는 하루인가, 아니면 스스로 살림을 짓는 푸른숲을 담은 손길로 차근차근 펴는 사랑인가? 겨울은 고요히 잠들어 꿈을 그리는 철이고, 봄은 천천히 깨어나서 꿈씨앗에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리고 잎을 틔워서 마침내 꽃을 피우려는 철이다. 겨울이 있어야 봄이 있다. 봄이 있기에 겨울이 오면서 쉰다. 물결은 오르고 내리기에 언제나 맑다. 사람도 책도 살림도, 숲도 하늘도 바다도, ‘흐르다 = 오르내리다 = 움직이다’요, 좋음도 나쁨도 따로 없이, 오직 이 삶이라는 물결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는 사이에 문득 사랑을 깨달아서 가만히 봄햇살과 겨울햇볕으로 풀어내는 길이다. 이쯤 생각에 잠기다가 머리로 번쩍 하고 벼락이 친다. 우리 집에서 열일곱 살을 맞이한 큰아이는 《유리가면》에 나오는 두 사람을 놓고서 함께 이야기할 나이에 이르렀구나. 곁에 작은아이도 앉혀서 왜 이 책에 나오는 두 사람을 이야기해 보는지 귀기울여 보라 하면서, 작은아이 생각을 펼쳐 보라고 물어볼 수 있겠네.
ㅅㄴ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