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 마을책집 이야기
철마다 새롭게 (2023.4.15.)
― 부산 〈비온후〉
여름은 맨발로 흙을 디디며 일하거나 놀기에 즐겁습니다. 가을은 가랑잎이 감겨드는 흙을 부드러이 어루만지면서 하늘빛을 머금기에 기쁩니다. 겨울은 시든 풀줄기가 싯누런 빛으로 사그락사그락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고즈넉합니다. 봄은 맨손으로 흙을 만지면서 햇볕을 쬐고 바람을 마시기에 반갑습니다.
온나라에 마을나무랑 골목나무가 옅푸른 잎빛으로 맑게 번지는 철에 부산으로 마실합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이야기꽃을 펼 텐데, 먼저 마을을 휙 돌아봅니다. 이미 한 바퀴 돌아본 마을이어도 다시 돌아봅니다. 예전은 예전이고, 어제는 어제입니다. 오늘은 오늘이요, 모레는 모레예요.
우리 집 마당에서 날마다 보는 나무도 아침저녁으로 다릅니다. 나날이 다르고, 다달이 다르며, 철철이 다를 뿐 아니라 해마다 달라요. 으레 거니는 길이어도 모든 날마다 새롭게 보는 바람과 해와 소리와 숨결이 있습니다.
같은 책을 되읽는 뜻하고, 같은 길을 다시 걷는 마음은 같아요. 쳇바퀴로 여기면 늘 똑같아 보여서 지겹거나 싫을 테지만, 언제나 새롭게 피어나는 삶인 줄 알아차린다면 “겉모습이 얼핏 비슷해 보여도 늘 다른” 결을 맞아들일 만합니다. 같은 책을 천천히 되읽을 적에도, 늘 새삼스레 깨달으면서 눈뜨는 밑동이 있어요.
저는 아이를 낳아 돌보는 길이 ‘힘들다’고 느낀 적이 여태 없습니다. 이때에는 이렇구나 하고 느끼고, 저때에는 저렇네 하고 느낍니다. 이 일은 이렇게 하는구나 하고 배우고, 저 일은 저렇게 여미는구나 하고 고개숙입니다. 어설프거나 엉성한 매무새는 “아하, 이렇게 하니까 어설펐네” 하고 뉘우칩니다. “저런, 난 여태 이 살림길을 마음에 안 담았구나. 참 바보스러웠네” 하고 되새깁니다. 모든 하루는 즐겁게 배우는 꽃날입니다. 배우니 꽃날이요, 안 배우니 끄트머리인 벼랑입니다.
새벽에 문득 떠올라 몇 가지 노래를 씁니다. 하나는 〈비온후〉라는 책집이름을 붙인 노래요, 둘은 “내가 안 쓰는 말”이라는 글머리로 잇는 노래예요. 이제까지 쓴 노래는 “내가 쓰는 말”을 글감으로 삼았는데, “나는 안 쓰되, 둘레에서 흔히 쓰는 말”을 놓고서 어떻게 달래어 풀어낼까 하는 마음을 담아 봅니다.
수런수런 말이 오갑니다. 사근사근 이야기가 흐릅니다. 사람과 삶과 사랑이 맞물리는 실타래를 살짝 풀고서 길손집으로 돌아가는 밤에 생각합니다. 낱말책을 쓰고 책을 읽는 사람이기에, 길손집 책자리가 대수롭습니다. 책을 펴고서 읽을 뿐 아니라, 붓을 쥐어 글을 쓸 만한 자리가 느긋한 곳에서 하루를 묵으면 아늑해요. 한 손에는 호미를 쥐어 흙을 만지고, 다른 손에는 붓을 쥐어 꿈을 토닥입니다.
ㅅㄴㄹ
《헌책방에서 보낸 1년》(최종규, 그물코, 2006)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