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자격을 얻어 문학과지성 시인선 557
이혜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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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 문학비평 . 시읽기 2024.1.10.

노래책시렁 391


《빛의 자격을 얻어》

 이혜미

 문학과지성사

 2021.8.24.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 아이들한테 속삭인다고 여기면서 말을 한다면, 제 손과 입과 눈과 귀에서 피어나는 말은 반짝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 아이들이 속살거리는구나 하고 느끼면서 말을 들으면, 온몸과 온마음으로 스미는 말이 춤춥니다. ‘저분’이라고 여길 적하고, ‘저놈’이라고 여길 적에는, 우리가 스스로 펴는 말이나 듣는 말이 다릅니다. “저 꽃”이라고 볼 적하고, “저 서울”이라고 볼 적에도, 우리가 스스로 나누는 말이 달라요. 《빛의 자격을 얻어》는 어떤 마음인 채 어떤 말을 나누려는 글자락일까요? 굳이 ‘시’를 쓰지 않는다면, 언제나 ‘말’을 나누는 마음으로 문득 몇 마디를 추스른다면, 애써 ‘문학’을 하지 않는다면, 오늘도 어제도 모레도 서로서로 노래로 피어나는 사랑을 누린다면, 글자락이 확 달랐으리라 생각합니다. 글은 언제나 말을 담고, 말은 언제나 마음을 담습니다. 마음은 언제나 삶을 담고, 넋은 언제나 우리가 온몸으로 삶을 누리도록 북돋웁니다. 이 얼거리를 헤아린다면, 말글이 늘 반짝여요. 이 얼거리를 안 헤아리면, 말글을 꾸미다가 헤매요. 말빛을 보기에 마음빛을 봅니다. 글빛을 읽기에 삶빛을 읽어요. 턱(자격)을 치워야 바람이 드나듭니다. 


ㅅㄴㄹ


가장 아름다울 때 가장 슬픈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오늘은 달무리를 떠나왔고 아침에 못다 쓴 눈보라에 집중했다. 교차하던 밤과 낮. 기만과 거짓. 목을 다정하게 조여오던 손에게 더없이 친절해지던. 밤의 가장자리로 엎드리며 나는 순한 목소리가 되고 싶었다. (삭흔/35쪽)


커피를 마실 때 불운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 검은 것을 만지며 먼 곳을 생각하지 않는다 / 차가운 물을 마실 때는 식물 아닌 것을 떠올린다 / 무늬가 화려한 옷을 입고 잠들지 않는다 (드림캐처/52쪽)


+


《빛의 자격을 얻어》(이혜미, 문학과지성사, 2021)


수평선은 누군가 쓰다 펼쳐둔 일기장 같아

→ 물금은 누가 쓰다 펼쳐둔 하루글 같아

→ 물끝금은 누가 쓰다 펼쳐둔 날적이 같아

9쪽


나는 당신이 내버렸던 과실

→ 나는 그대가 내버린 과일

→ 나는 네가 내버린 알

12쪽


배달집 전단지들이 점점 화려해지는 이유를

→ 나름집 꾸러미가 자꾸 반짝거리는 뜻을

→ 돌림집 알림쪽이 더 무지갯빛인 까닭을

→ 날개집 쪽갈피가 날로 반들거리는데

15쪽


저기압골이 굵어지는 새벽 출항이다

→ 낮바람골이 굵은 새벽에 떠난다

→ 바람골이 굵은 새벽에 떠난다

22쪽


오늘을 감당하느라 열 손가락이 녹아들던 우기

→ 오늘을 메느라 열 손가락이 녹아들던 비날

→ 오늘을 지느라 열 손가락이 녹아들던 비철

24쪽


투입구로 불쑥 들어오던 손

→ 밑으로 불쑥 들어오던 손

→ 구멍으로 불쑥 들어오던 손

→ 굿으로 불쑥 들어오던 손

→ 틈으로 불쑥 들어오던 손

27쪽


비참을 껴안으며 조개는 날아오르고

→ 슬픔을 껴안으며 조개는 날아오르고

→ 구렁을 껴안으며 조개는 날아오르고

→ 눈물을 껴안으며 조개는 날아오르고

→ 가난을 껴안으며 조개는 날아오르고

30쪽


겨울이 복용한 가루약이 서서히 헐거워지는 새벽입니다

→ 겨울에 넣은 가루가 천천히 헐거워가는 새벽입니다

38쪽


멀어지는 중이니까

→ 멀어지니까

→ 멀리 가니까

43쪽


불투명한 스노우볼처럼

→ 흐릿한 눈꽃공처럼

→ 보얀 눈덩이처럼

46쪽


간이침대는 창백하게 젖어듭니다

→ 접는자리는 허옇게 젖어듭니다

→ 곁자리는 파리하게 젖어듭니다

70쪽


멀리서 모국어를 데려와 선물하던 밤

→ 멀리서 우리말을 데려와 베풀던 밤

→ 멀리서 엄마말을 데려와 건네던 밤

→ 멀리서 겨레말을 데려와 읊던 밤

72쪽


너는 몇 층의 눈을 가졌을까

→ 네 눈은 몇 겹일까

→ 너는 눈이 몇 켜일까

106쪽


두꺼운 이불 아래에서 서로를 만지며

→ 두꺼운 이불 밑에서 서로를 만지며

→ 두꺼운 이불을 덮고 서로를 만지며

116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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