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 마을책집 이야기


철들기 (2022.11.21.)

― 부천 〈용서점〉



  11월이 무르익을 즈음은 시골도 서울(도시)도 가을빛이 흐드러집니다. 네철은 ‘첫·한·늦’으로 다릅니다. 첫여름·한여름·늦여름이 다르고, 첫가을·한가을·늦가을이 달라요.


  우리말을 살피면, ‘다르다·닮다’는 한동아리입니다. 다르기에 닮고, 닮기에 다릅니다. 다르다고 할 적에는 닮은 데가 반드시 있고, 닮다고 할 적에도 다른 구석이 꼭 있습니다.


  네 가지 철은 서로 다르지만, 뭇숨결이 살아가는 길을 알려주는 길잡이 노릇으로는 매한가지입니다. 네 가지 철은 서로 닮되, 온누리가 흐르는 길이 얼마나 다른지 알려주는 눈금입니다. 철을 알기에 눈이 밝아요. 철이 들기에 눈이 빛나요. 철을 모르기에 눈이 어두워요. 철을 잊기에 그만 어리석게 굴어요.


  서울에서 부천으로 전철을 달리는 길에서는 철을 느끼거나 읽거나 알기 어렵습니다. 그저 이 전철길이 고단하다고 느낄 뿐입니다. 어쩌면 이 길을 늘 오가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들은 어마어마하게 지치겠다고 느낍니다. 바람도 해도 눈비도 모르는 채 맴돌아야 하는 전철길입니다. 서울에 집이 있더라도 아침저녁으로 끔찍하게 짓눌리고 밟히고, 서울에 집이 없으면 새벽밤으로 더 모질고 사납게 일그러지고 망가집니다.


  가을잎이 길바닥을 가득 채웁니다. 밖에 나와 밖바람을 쐬며 숨을 돌립니다. 〈용서점〉으로 걸어갑니다. 늦가을이라는 철을 돌아보며 늦가을 수다꽃을 피웁니다. 아직 덜 철이 들었기에 마음을 일깨우려고 책을 더 읽고 장만하고 새기면서 이야기를 폅니다. 앞으로 철이 들고 싶기에 생각을 밝히고 책을 다시 읽고 사들이고 손수 쓰면서 이야기를 베풉니다.


  읽고 느끼고 헤아리는 마음을 펼치는 모든 숨결에는 오늘 하루를 짓는 생각이 차곡차곡 깃듭니다. 많이 읽거나 빨리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늘 읽으면 됩니다. 종이책도 읽고, 살림살이도 읽고, 풀꽃나무도 읽고, 날씨도 읽을 노릇입니다. 하루에 책을 읽는 겨를만큼 살림을 돌보고, 아이 곁에서 이야기를 함께하고, 이슬이며 별밤을 느긋이 누리면 되어요. 이름을 드날리는 책에 안 사로잡히면 됩니다. 우리 이름을 되새기면서 꽃이름하고 별이름을 짚으면 됩니다. 놀라운 책이나 대단한 책이 아니라, 우리 마음그릇이라는 책을 살피면 아름다워요.


  몸을 내려놓아도 넋은 언제나 함께 있습니다. 몸에 깃들어도 넋이 몸을 건사하고 움직입니다. 겉몸이 아닌 속마음을 읽고 익히고 잇기에 모든 숨빛이 사랑입니다.


《종이의 신 이야기》(오다이라 가즈에 글·고바야시 기유우 사진/오근영 옮김, 책읽는수요일, 2017.12.22.

#大平一枝 #紙さまの話 #紙とヒトをつなぐひそやかな物語

《해방의 미학》(富山妙子/이현강 옮김, 한울, 1985.9.10.첫/1995.4.30.재판2벌)

- 도미야마 다에코

《위대한 몰락》(엔도 슈사꾸/김갑수 옮김, 홍성사, 1983.7.15.)

《김지하論·神과 혁명의 통일》(푸미오 타부치/정지련 옮김, 다산글방, 1991.5.25.)

《채식주의자》(한강, 창비, 2007.10.30.)

《J 이야기》(신경숙, 마음산책, 2002.8.5.)

《한 문장》(김언, 문학과지성사, 2018.1.8.)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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