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2023.9.22.
수다꽃, 내멋대로 49 민소매 강사
1991년에 들어간 푸른배움터(고등학교)에서 힘든 한 가지는 배움옷(교복)이었다. 나는 ‘폴리(플라스틱 화학섬유)’ 옷을 못 입는다. ‘폴리’로 짠 옷은 200만 원짜리이건 이천 원짜리이건 살갗에 닿으면 두드러기가 난다. 그런데 푸름배움터에서 입히는 배움옷은 ‘100퍼센트 폴리’였다. ‘폴리·아크릴’ 같은 죽음실(화학섬유)이 살갗에 닿으면 두드러기가 나는 사람이 꽤 있고, 멀쩡한 사람도 많다. 자, 그러면 그대는 ‘죽음실이 살갗에 닿으면 소름이 돋고 두드러기가 나는 사람’한테 ‘100퍼센트 폴리’나 ‘50퍼센트 폴리’나 ‘20퍼센트 폴리’ 옷을 건네면서 입으라고 하겠는가? 그대는 죽음천을 이웃한테 뒤집어씌울 셈인가? 이웃을 옷으로 죽일 셈인가? 달걀이나 치즈가 몸에 안 받는 사람한테 달걀이나 치즈를 억지로 먹이다간 목숨을 잃을 수 있다. 김치가 몸에 안 받는 사람한테 김치를 마구 먹이려 하면서 “어떻게 한국사람이 김치를 못 먹어?” 하고 다그치면, ‘죽임질(살인)’하고 같다. 나는 집에서건, 저잣마실을 가건, 두바퀴(자전거)를 달리건, 이야기꽃(강의)을 가건, 가시아버지(장인)한테 찾아가건, 4월부터 11월 사이에는 민소매옷을 걸친다. 살갗이 바람을 쐬도록 틔워 놓는다. 1986년에 소련 체르노빌 핵발전소가 터진 뒤로 우리나라에 ‘방사능 오염 분유’가 잔뜩 들어왔는데, 그때부터 우리나라 ‘유제품’은 ‘체르노빌 방사능 오염 분유’로 만들어서 팔기 일쑤였다. 나는 어릴 적에 왜 살갗에 그렇게 두드러기가 돋으면서 부풀었는지 몰랐다. 우리 언니도 마을 아이들도 죄다 살갗에 두드러기가 돋고 부풀면서 몇 해를 앓았다. 1986년 ‘체르노벨 방사능 오염 분유로 만든 유제품’을 잔뜩 먹고자란 아이들은 어느새 ‘어른’이 되어 딸아들을 낳아 돌보는 살림으로 나아갔는데, 그런 ‘방사능 오염 분유 유제품’을 먹고도 멀쩡한 사람이 있을 테지만, 두드러기에 몸앓이로 애먹은 사람이 있고, 무엇보다도 요새 태어나서 자라는 거의 모든 아이들이 ‘살갗앓이(아토피)’로 시달린다. 공공기관이건 학교이건, ‘강사’라는 이름인 사람이, 더구나 ‘국어사전 편찬자’라는 사람이, ‘자가용을 몰지도 않고 자전거를 달리면서 강의를 하러 찾아가는’ 줄, 썩 달가이 받아들이지 않더라. “적어도 반소매에 긴바지를 입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고 눈을 흘기거나 따지는 관리자나 교감·교장이 수두룩하다. 그들 가운데 “강사님은 왜 민소매에 반바지를 입습니까?” 하고 궁금해서 묻는 사람을 아직 못 봤다. “민소매에 반바지를 입는 뜻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면서 ‘옷차림을 놓고서 배우려’는 마음은, 이 나라 벼슬아치나 길잡이(교사)한테 없을까?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씨를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삶을 배우고 살림을 익히며 사랑을 찾을 수 있는 줄 깨달으려는 벼슬아치나 길잡이는 없을까? 없지 않으리라. 있으리라. 그저 아직 거의 못 만났을 뿐이리라. 재미있게도, “선생님! 반소매에 긴바지를 입어야지요!” 하고 따진 어린이나 푸름이는 아직 한 사람도 못 만났다. 어린이하고 푸름이는 으레 “선생님! 선생님은 어른인데 왜 민소매에 반바지를 입어요? 왜 운전면허를 안 따고 자전거를 타요?” 하고 묻더라. 그래서 어린이하고 푸름이한테 조곤조곤 이야기로 들려주니, 귀기울여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끄덕 웃더라. 요새 난 관리자나 교감·교장한테 슬며시 되묻는다. “우리 관리자(교감·교장) 선생님은 왜 이 한여름에 구태여 긴팔에 긴소매인 양복을 차려입으시나요? 양복은 서양옷이잖아요. 서양옷이 나쁠 일은 없지만, 서양옷을 갖추어야 예의일까요? 저는 겨울에는 반소매에 반바지를 입습니다. 사람마다 몸도 마음도 다른 줄 안다면, 겉모습이나 옷차림이 아닌 숨결을 바라보고 읽으시기 바랍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