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원고지 10장 : 글을 써 달라고 하는 곳이 있으면 꼭 “원고지로 몇 장입니까?” 하고 묻는다. ‘A4 한두 장’이나 ‘A4 서너 장’이라고 하면 종잡을 길이 없다. 더구나 이렇게 써 달라고 하는 데치고 글을 글로 바라보거나 여미지 않더라. ‘문화’를 다룬다고 하는 나라일터(공공기관)에서 내라는 글자락(서류)을 보면 ‘200자·400자·800자·1000자’처럼 제대로 밝힌다. 셈겨룸(시험문제)에서도 ‘글씨로 몇’만큼 써야 하는지 똑똑히 밝힌다. 인천 미추홀구에서 내는 〈나이스미추〉에서 우리말 이야기를 써 달라고 해서 써서 보냈다. ‘A4 종이 한두 장’을 말하기에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원고지로 딱 잘라서 몇 장을 써야 하는가 알려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곳에서는 ‘원고지 10장’이라 하더라. 그래서 ‘원고지 10장’에 맞추어 줄거리하고 이야기를 잡아서 썼다. 그런데 이들은 글이 길다며 ‘A4 종이 한 장’으로 잘라 달라고 한다. “A4 종이 한 장이라고 하면 길이를 알 수 없습니다. 원고지로 셈해서 말씀하셔요.” 하고 대꾸했지만, 딴소리만 한다. 더구나 그들 스스로 글길이를 잘못 말했으면서 “잘못했다”나 “미안하다” 같은 소리도 없다. 그들 할 말만 하더니 전화를 뚝 끊는다. 땀흘려 일하는 벼슬꾼(공무원)도 있을 테지만, 엉터리 벼슬꾼도 많다. 이들은 나한테 “글이 어려우니 쉽게 써 주셔요.” 하는 말을 다섯 벌쯤 보태기도 했다. 이들이 말하는 ‘쉬운 글’이란 뭘까? ‘나이스미추’라는 이름이 쉽다고 여기는가? 인천 남구(미추홀구)는 숲노래 씨가 태어나서 어린날을 보낸 골목마을이지만, 예나 이제나 그 골목마을 벼슬꾼이 참하거나 착하다고 느낀 적이 아직 아예 없다. 우리 어머니가 그들(그 골목마을 공무원)한테서 받거나 겪어야 한 꾸지람을 잊지 못 한다. 어릴 적에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서 함께 동사무소에 갔는데 어머니더러 “잘못 썼다”는 둥 “한자도 못 읽고 못 쓴다”는 둥 “이런 쉬운 것도 왜 못 쓰느냐”는 둥, 30분 넘게 타박을 했지. 마흔 해쯤 앞서 우리 어머니는 아뭇소리도 못 하고 고개만 주억거릴 뿐이었다. 이 꼴을 여러 해 지켜본 어느 해에 열 살 아이가 천자문을 빠짐없이 익히고서, 이다음부터 동사무소에서 뭘 써서 내야 할 일이 있으면, 어린 내가 다 써서 냈고, 동사무소 공무원이 트집을 잡을라 치면 “아저씨가 잘못 읽었어요”라든지 “아줌마가 틀렸어요” 하고 옆에서 거들었다. 골목마을 다른 할매나 아주머니도 으레 동사무소 공무원한테 타박이며 꾸지람을 들었기에, 어머니를 따라 동사무소에 간 날이면, 이웃 할머니하고 아주머니 글자락도 으레 써 주곤 했다. 열네 살이 되어 중학교에 갈 적부터 더는 어머니하고 동사무소에 함께 가서 어머니를 거들지 못 했다. 2023.9.12.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