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균열과 혼의 공백
유미리 지음, 한성례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5월
평점 :
절판


숲노래 인문책 / 숲노래 책읽기 2023.6.10.

헌책읽기 12 세상의 균열과 혼魂의 공백



  저는 전라남도 고흥이라는 시골에서 살아갑니다. 전남 작은시골에 깃들어 열 몇 해란 나날을 보내기 앞서까지 ‘전라도가 이다지 썩은 줄’ 조금도 몰랐습니다. 인천에서 나고자라는 동안 ‘인천이 허벌나게 썩었다’고 늘 느꼈고, 서울로 옮겨 대학교를 다니다 그만두고서 출판사에 들어가 일할 즈음 ‘서울이 더럽게 썩었다’고 으레 느꼈으며, 충청북도로 옮겨 이오덕 어른 글자락을 갈무리하며 다섯 해쯤 사는 동안 ‘충청도를 비롯해 글판·배움판(교육계)이 썩어문드러진 꼴’을 언제나 새삼스레 보았습니다. 이따금 부산마실을 하면서 부산 곳곳에 ‘부산시가 헛돈을 쏟아부은 얼나간 관광시설’을 지켜보면서, 그야말로 이 나라 구석구석 안 썩은 데가 있나 고개를 갸웃합니다. 우리나라에 ‘진보·보수’가 있을까요? ‘다 썩은 무리’하고 ‘확 썩은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유미리 님이 쓰는 글이 한동안 한글판으로 잇달아 나왔지만 이제는 거의(또는 아예) 안 나옵니다. 《세상의 균열과 혼魂의 공백》을 읽고 보면, ‘속속들이 썩은 일본과 한국 사이’에서 도무지 뭘 할 수 있겠는가 싶어 속으로 앓다가 조용히 눈물을 거두고서 차분하게 ‘오늘 이야기를 글로 남기는 눈빛’을 느낄 만합니다. 한글이되 우리말이라 하기 어려운 “세상의 균열과 혼魂의 공백”은 뭘까요? 이렇게 옮기고서 ‘번역’을 했다고 여기는 쓸쓸한 민낯입니다. “世界のひびわれと魂の空白を”인데 ‘を’는 어디에 팔아먹었나요? ‘ひびわれ’하고 ‘魂の空白’은 ‘틈’과 ‘빈얼’로 옮겨야지 싶습니다. ‘世界’는 “이 땅”으로 옮겨야 할 테지요. 왜 그럴까요? 유미리 님은 “푸른별(지구)이라는 이 땅에 아무런 ‘틈(틈새)’이 없어 싹틀 수도 움틀 수도 없는 사랑이 슬픈 나머지, 사람들이 잊다가 잃어 ‘텅 빈 얼’을 스스로 아파한 나머지, ‘이 꼴을’ 어떡해야 아이한테 안 물려줄까?” 하고 속삭입니다. ‘물려주고 싶은 땅과 틈과 얼을’ 생각하는 글자락입니다. 우리가 ‘어른’이라면 ‘얼차릴’ 일입니다.



《세상의 균열과 혼魂의 공백》(유미리/한성례 옮김, 문학동네, 2002.5.25.)


#이땅에서틈과빈얼을

#世界のひびわれと魂の空白を #柳美里


ㅅㄴㄹ


내 이름은 미리(美理)다. 구청에서 알아보았더니, ‘밀양(密陽)’의 어원은 ‘수룡(水龍/미리리)’이라고 한다. 밀양, 미리리, 미리. 그리고 두 살 때 죽은 외할아버지의 바로 아래 동생은 ‘수룡(水龍)’이라는 이름이었다. (51쪽)


그들의 무례를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시간 약속이나 일을 진행하는 게 분명하지 않고 약속을 지키지 않고도 사과하지 않으며 깊이 생각하지 않고 우선 행동부터 하고 있는 그들에게 나는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살면서 몸에 밴 법칙과 습관으로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기분이 나빠지고 화가 났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내 안에 있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시스템으로 그들을 비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59쪽)


전후 일본인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선택한 것일까? ‘나라를 위해’를 ‘회사를 위해’로 바꾸고 기업 전사가 되어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거품경제가 터진 지금, 사람들의 손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평화? 전후 민주주의? (72쪽)


며칠 전에 있었던 일본 교직원 노동조합 대회와 사회당 임시 당대회를 보도로 알았는데, 두 대회가 어쩌면 그렇게 닮았는지 매우 놀랐다 … 무엇이 닮았는가 하면, 논의 끝에 방침을 결정하는 게 아니고 사전에 다수파에 의해 방침이 결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중간파나 반대파가 뒤엉켜서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게 위해 물밑에서 혹은 공공연히 흥정으로 일관한다. (81쪽)


선거권도 없는 재일한국인에게 왜 납세 의무가 있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듬해부터 나는 아주 간단하게 납세자가 되었다. (111쪽)


대동아 공영권의 망령은 고도성장기에도 출현했다. 회사를 위해 다른 건 개의치 않고 멸사봉공으로 일했다. 공해로 사람이 죽어도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한 회사는 없었을 것이다. 아직도 수은중독 공해병인 미나마타병은 해결되지 않고 있다. (127쪽)


대화가 가장 활발하게 오가던 그 당시조차 대리인이라는 무사시 대학의 여교수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네가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고생하며 자랐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재일한국인들 중에서 너 같은 사람은 흔하다. 그런데 그걸 장사밑천 삼아 텔레비전이나 잡지 인터뷰에서 주절주절 떠들어대고 있다니, 바보 아니냐! 자살 미수 경험도 있다고 하던데 자실을 팔아먹겠다면 지금 당장 죽는 게 어때?” 이렇게 작품과는 전혀 관계도 없는 일로 매도하고 협박하더니 덧붙였다. “두고봐라. 너를 사회적으로 매장시켜버릴 테니. 우리는 너 같은 사람 간단하게 매장시킬 수 있는 인맥과 힘이 있어.” 그래도 나는 어떻게든 화해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177)


류세이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아이 초상화를 다른 가족의 찬성을 얻을 때까지 고쳐 그려야 한다고 요구하면 어떤 화가라도 경악할 것이다. 이런 얘기는 누가 들어도 황당무계한 얘긴데, 회화에서는 있을 수조차 없는 일이 어떻게 소설에서는 가능한지, 꼭 오에 씨에게 묻고 싶다. (190쪽)


그러자 그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문예지에 실린 형편없는 소설 따위를 뭐 하러 읽나? 차라리 플로베르의 작품을 읽는 게 백 번 낫지. 그러고 보니 얼굴이 제법 반반하군. 누드 사진집 내면 팔릴 것 같지 않아?”라고 말했다. 그때까지도 내 손은 가만히 있었다. 내 손이 날아간 것은 바로 그 다음에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기 때문이었다. (227∼228쪽)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둔 무식한 작가가 확고부동한 사회적 지위와 권위를 갖고 있는 인물들을 향해 언론전을 벌였다는 사실도 그들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행위였을 것이다. 그들은 내 의견을 일축할 수도 없었다. (245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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