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모든 풀은 들꽃 (2023.4.14.)

― 부산 〈카프카의 밤〉



  〈글밭〉에서 산 책은 빗물에 안 젖도록 쌌습니다. 빗줄기는 차츰 굵군요. 망미동에서 슬슬 걸어 연산동으로 건너옵니다. 빗길입니다. 비가 오는 길입니다. 비를 맞으면서 걷습니다. 맨몸으로 비를 맞으며 걷는 분이 드문드문 있습니다. 슈룹(우산)을 미리 안 챙겼으니 빗물에 젖을 수 있고, 이맘때 봄비는 우리 숨결을 살려주는 아름다운 윤슬이라고 여겨 반가이 누릴 만합니다.


  안골목으로 걸으니 연산고을책숲(시립도서관)이 나오고, 이 곁에 〈카프카의 밤〉이 있습니다. 책숲 곁에 책집이군요. 한켠은 너른터이고, 맞은켠은 작은터입니다. 이켠은 이야기숲이고, 맞은켠은 이음터입니다.


  모든 풀은 들꽃입니다. 꽃이 피지 않는 들풀은 없습니다. 모든 나무는 숲꽃입니다. 꽃이 없는 나무는 없어요. 마을을 보려면 마을사람이라는 마음으로 천천히 거닐면 됩니다. 아이들은 쇳덩이(자동차)를 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걸어다닙니다. 아이들이야말로 빛나는 마을지기이면서, 마을살림을 보여줍니다.


  책집 〈카프카의 밤〉에 닿습니다. 빗물을 바깥에서 가볍게 털고서 들어섭니다. 이곳은 작은숲입니다. 큰숲 곁에 작은숲입니다. 로라 잉걸스 와일더 님이 쓴 《큰숲 작은집》(Little House in the Big Woods)이 떠오릅니다.


  걷다 보면, 부스러기를 걷어내는 눈빛을 느낍니다. 스스로 걷지 않고, 천천히 걷지 않고, 아이랑 손잡고 걷지 않는 사람들이 글과 말로만 읊는다면, 이들은 ‘겉·허울(위장진보·위장지식인)’일 테지요. 글을 쓰고 말을 하는 사람으로 넋이 제대로 박히려면, 두 다리로 걸을 노릇이지 싶어요.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보금자리에서 걷고, 마당에서 걷고, 뒤뜰을 걷고, 숲을 걷고, 골목을 걷고, 이웃집으로 걸어가면, ‘겉·허울(위장진보·위장지식인)’로 둘러싼 부스러기(위장진보 출판사·위장지식 출판사)를 한 올 두 올 걷어낼 만하지 싶습니다. 두고두고 이을 아름책은 언제나 ‘걷는이’가 썼어요. ‘안 걷는이’는 늘 허울스럽습니다.


  다시 길을 나설 즈음 〈카프카의 밤〉 지기님이 슈룹을 건넵니다. 비를 맞으며 걸어도 즐겁지만, 비를 가리며 책을 아껴도 즐거운 일입니다. 빗길을 걷다가, 예전에 〈연산헌책방〉이 있던 곳을 어림합니다. 〈연산〉 책집지기님은 요새 무엇을 하시려나 하고 돌아봅니다. 해가 질 무렵 하루일을 마감하면서 “술 한 모금에는 책 하나가 가장 좋은 안주 아임니꺼?” 하며 웃던 얼굴을 떠올립니다.


  사랑으로 바라보아 주기에, 사랑씨앗을 알아보며 품어주는 손길을 누려요. 사랑이 없기에 바라보지 않고, 사랑을 잊었기에 마음도 글빛도 목소리도 잃어요.


ㅅㄴㄹ


《소리 교육 2》(머레이 셰이퍼/한명호·박현구 옮김, 그물코, 2015.9.20.)

《프리덤, 어떻게 자유로 번역되었는가》(야나부 아키라/김옥희 옮김, AK커뮤니케이션즈, 2020.3.15.)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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