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2023.5.31.

수다꽃, 내멋대로 44 분노



  ‘불타오르(분노·증오)’면, 앞뒤를 안 본다. 불타오르는 터라, 오직 ‘미워하고 싫어하는 놈’만 쳐다보면서 이글이글 태워죽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으로 타오르기 때문에 ‘저놈만 죽이면 다 돼!’ 하고 여기는데, 저놈을 불길로 태워서 죽였는데, 뜬금없이 ‘아무 잘못이 없는 딴사람’을 불태우기 일쑤이다. 또는 ‘미운놈을 태워죽이’려다가 애먼 사람까지 태워죽이기 일쑤이다. “모기를 잡으려다 집을 불태운다”라는 옛말이 있다. 우리가 ‘불(분노·증오)’이 되어버리면, ‘앞뒤가림’을 아예 잊고 말기에, ‘참(진실)’을 보려는 마음이 아닌, ‘미운놈을 찾아내고 솎아내어 죽이고픈 마음’이 가득하고 만다. ‘참(사랑이 가득한 마음)’이 아니라 ‘차가움(미움이 가둑한 마음)’으로 기운 탓에, 그놈도 죽이지만, 나도 죽고, 우리 둘레 착한 사람까지 다 죽인다. 이른바 ‘정의의 용사’가 나와서 ‘밉놈(악당)’을 물리치는 만화를 보자. ‘밉놈’ 하나를 죽인다면서 그만 마을(도시)을 송두리째 불바다로 만들지 않는가? 이 모습이 바로 ‘분노라고 하는 민낯’이다. 불(폭탄)은 아무것도 안 가린다. 무턱대고 덤벼서 모조리 죽음이란 잿더미로 몰아붙이는 기운이 불(분노·증오)이다. 얼핏 보았을 적에 아이가 그릇을 깨뜨렸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아이는 얌전히 있었는데, 바람이 훅 불고 지나가면서 그릇이 흔들려 저절로 떨어져서 깨질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엄마아빠가 아끼는 그릇을 왜 깼니!” 하면서 확 불타올라 아이를 다그치거나 나무라거나 때리기까지 한다. 불타오르는 엄마아빠를 본 아이는 ‘불타오른 엄마아빠는 내(아이) 말은 아예 안 듣는’ 줄 알아차리며 그저 두려워 말도 못 한다. 숱한 어버이는 아이가 잘못하지 않은 일을 아이한테 그만 덤터기를 씌운다. 왜냐고? 어버이 스스로 앞뒤를 못 가리도록 스스로 불(분노)이 된 탓이다. 이른바 나라꼴(정치·사회)을 보면, 이쪽도 저쪽도 못난놈이다. 우두머리(권력자)란 모름지기 ‘사람들 눈을 속이면서 돈·이름·힘을 거머쥐는 자리’이기에, ‘깨끗한 우두머리’란 없다. 참말로 없다. 깨끗한 사람은 우두머리(정치·교육·문화예술 지도자)가 되지 않는다. 깨끗한 사람은 조용히 철들어 착한 어른이 될 뿐이다. 착한 어른은 언제나 아이들 곁에서 도란도란 같이 소꿉놀이를 하고, 아이 눈높이를 헤아려 ‘쉬운말’을 쓰고, 언제 어디에서나 아이들을 품고 감싸고 돌보는 길을 간다. 착한 어른은 우두머리 짓을 안 하고, ‘이슬떨이’로서 ‘길잡이’를 할 뿐이다. 길잡이는 앞장서거나 나서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즐겁게 스스럼없이 나아가고서, 아이들이랑 손에 손을 잡고 나란히 노래길·놀이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보라. 대통령·국회의원·시도지사·시의원·군의원 가운데 ‘이슬떨이로서 어린이 곁에서 소꼽눌이를 하고 쉬운말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어른’이 있는가? 아예 없다. 그러니, 우리는 나라꼴(정치·사회)을 쳐다보면 그저 불(분노)이 치밀어오를밖에 없다. 그러니까, 나라꼴을 쳐다보지 않을 노릇이다. 아이들 얼굴을 쳐다보고, 들꽃을 쳐다보고, 들숲바다를 쳐다보고, 해바람비를 쳐다보고, 마음빛을 쳐다보고, 이웃이랑 쉽게 주고받을 ‘착한 우리말’을 쳐다볼 노릇이다. 그러나 정 나라꼴(정치·사회)을 쳐다보고 싶다면, 먼저 ‘불타오르(분노·증오)’지 말아야 한다. 이놈이건 저놈이건 누가  더 잘못했는지 따지거나 탓할 마음을 싹 지워야 한다. 이놈이건 저놈이건 ‘왜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잘못했는지만 쳐다볼 노릇이고, 어느 쪽에 선 어느 놈이건 값(벌)을 달게 받도록 마음을 기울이고서 끝내면 된다. 보라! ‘전두환 손자’한테 돌을 던질 수 있는가? 엄마아빠랑 할매할배를 ‘잘못 만난 탓’에 제법 오래 굴레에서 허덕인 줄 오래도록 모르다가, 뒤늦게 알아차리고서 하나하나 알아가는 동안 ‘전두환 손자’ 스스로 알게 모르게 저질렀을 숱한 잘잘못을 털어내려고 용쓰는데, 잘못을 뉘우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한테 어찌 돌을 던지는가? 그러니까, 이쪽이건 저쪽이건 잘못을 말끔히 뉘우치고서 값(벌)을 달게 받으려는 사람은 너그러이 보아줄(용서) 노릇이요, 어느 쪽에 선 놈이건 콧대가 높고 핑계에 달아나기만 하는 놈은 ‘불길’이 아닌 ‘참(진실)’이라는 눈빛으로 딱하게 보며 타이르거나 나무라되, 그놈 스스로 값을 치를 때까지 안 잊으면 된다. 문득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이 눈물로 뉘우치는데, 이 아이들을 안 봐줄 수 있는가? 다시 잘못을 저지르면, 다시 돌아보면서 되새기도록 타이르고, 자꾸자꾸 타이르고 보듬을 노릇이다. 그런데, 우리가 불길(분노)에 휩싸이면 다 죽여버리고 마니, 불길이 아닌 ‘별빛’에 ‘햇볕’으로 스스로 숨길을 가다듬어야지 싶다. 밤길을 밝히는 횃불이나, 집안을 고요히 밝히는 촛불이 되자. 오직 사랑이라는 빛줄기를 가만히 품어 어른이 되자. 우리 엄마아빠가, 또 싸움터(군대)에서, 또 일터(회사)에서, 숱한 사람들이 불길(분노)에 휩싸여 나를 괴롭히거나 두들겨팬 짓을 치러 왔다. 그분들 눈에는 사랑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불이 아닌 사랑을 오롯이 그리려 한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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