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어제책 / 숲노래 숨은책 2023.4.3.
헌책읽기 10 두 민족의 접점에서
안 읽히거나 사라지는 책에는 안 읽히거나 사라지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지은이가 잘 쓰지 못 해서 안 읽히거나 사라지기도 하지만, 우리 스스로 눈먼 종살이를 하는 탓에 스스로 안 알아보거나 못 알아볼 뿐 아니라, 허물벗기나 날개돋이를 아예 생각조차 안 하는 탓이 대단히 큽니다. 《두 민족의 접점에서》는 일본에서는 제법 읽힌 책이고, 한글판이 가까스로 태어난 책이되, 고침판이 한 벌 나오기는 했으나 까맣게 잊힙니다. 글님은 예나 이제나 꾸준히 한·일(일·한) 두 나라 사이를 마음으로 잇는 징검다리라는 길을 천천히 가꿉니다. 노래님 이상은 씨는 글님이 도와준 손길에 힘입어 새길을 걸을 수 있었다지요. 잊혀진 헌책을 2022년에 문득 장만했고, 곰곰이 읽고서 열여섯 살 큰아이하고 함께 읽었습니다. 이 책이 갓 태어난 1989년부터 2023년에 이르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안 바뀌는 굴레를 엿보면서, 두 나라뿐 아니라 ‘두 나라에 깃든 사람들과 벼슬꾼과 먹물꾼’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돌아봅니다. 1961년에 태어난 글님은 두 이름을 품습니다. 하나는 ‘강신자’요, 둘은 ‘쿄 노부코’입니다. 글님은 으레 한자 ‘姜信子’로 적으면서 ‘강신자’ 아닌 ‘쿄 노부코’로 읽는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으면서 두 나라와 두 살림과 두 마음을 하나로 어우르면서 사랑이라는 빛길을 걸어가려는 뜻이라고 여길 만합니다. 한글·한말을 익히려고 무던히 애쓰셨다는데, 적잖은 한글책을 일본글로 옮기기도 했습니다. 요즈음은 ‘자이니치’라는 일본 말소리를 쓰는 분이 많고, 남녘에서는 ‘재일교포’라 하고 북녘에서는 ‘재일조선인’이라 합니다. 일본에서 살아가는 한겨레라면 ‘일본한겨레’라 하면 될 텐데요. ‘중국한겨레·일본한겨레·한국한겨레·미국한겨레’처럼 쓰면 되리라 봅니다. 뿌리를 내린 터전이 다르되, 이 푸른별에서 이루려는 뜻은 다툼질 아닌 어깨동무라면 ‘한겨레’를 넘어 ‘한사람·한사랑’으로 바라보면 될 테고요.
《두 민족의 접점에서》(강신자/송일준 옮김, 밝은글, 1989.10.10.)
대학을 1년간 더 다녔다. 소위 ‘취직차별’이 원인이다. 최초로 나 자신에게 심각한 문제로 ‘차별’이 대두된 것이다. 아직 젊고, 일본에서 살아갈 일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나에게 한국 국적을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회사에서 거부되었다는 사실이 생사를 가름하는 문제로 다가왔다. (18쪽)
조선반도에 왠지 모르게 친근감을 갖고 한글공부를 하고 있던 그 사람조차도 이 정도였다. 그렇다면 한국과 재일한국인에게 특별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뭘 알고 있겠는가. (27쪽)
“소중히 여겨 주어야 할 것이야.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혹시 친척들 사이에서 이 아이가 고통스런 입장에 서게 될지도 몰라. 자네밖에 없어. 그런 때에 딸아이를 지켜줄 사람은. 철저하게 지켜주어야 해.” 조용하게 천천히 그의 눈을 응시하면서 말씀하셨다. (31쪽)
“하지만 우리들은 일본인, 한국인을 말하기 전에 같은 인간 아닌가요?” 내 물음에 차별철폐운동을 하고 있는 40세 정도의 남성은 대답했다. “넌 너무 어수룩해. 그런 건 현실도피의 말에 지나지 않아. 우리들은 인간이기 이전에 조선인이다.” (37쪽)
시어머니는 참으로 평범한 일본 여인. 줄곧 사회생활을 하고 계신 분으로서 집에 틀어박혀 있는 가정주부보다 시야는 넓을지도 모른다. 매일 신문을 읽고 있어서 사회에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재일한국인의 지문날인거부를 눈여겨본 적도 없고 그 의미도 알 바 아니다. 원래 재일한국인을 본 적도 없는데다 말을 해본 적도 없다. 그런데 갑자기 참으로 미지의, 아들과 결혼할 여자로서 ‘나’라는 재일한국인이 나타난 것이다. (43쪽)
“왜 우리 집에서는 하나마츠리를 안 해, 엄마?” “우리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그런 습관이 없단다.” 참 시시하다고 생각하면서 언니들과 셋이서 손으로 히나사마를 만들었다 … 어린 마음에 ‘이건 손해잖아’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론 한국인 어린이를 위한 즐거운 행사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경험한 일이 없었다. (55쪽)
아버지가 무뚝뚝하게 대답하셨다. “선생은 안 돼. 공무원도 안 되고 보통 회사 같은 데도 안 되는 거야. 기술이라도 지니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어.” 냉정하게 설명해 주셨다. (61쪽)
이것으로 세 번째의 실수였다. 밖에 나갈 때는 외국인등록증을 잊지 말 것. 이것은 재일한국·조선인에게는 상식이다. (102쪽)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니다. 그 두 개의 마이너스도 서로 곱셈을 하면 플러스가 된다. ‘민족’과 같은 딱딱한 의식이 아니라 ‘재일한국인다움’ 같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149쪽)
아버지는 가와사끼고를 나와 쥬오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법조인이 되려는 꿈을 갖고 계셨다. 그러나 한국인에게는 사법시험을 치를 자격이 없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일본 기업에서 재일한국·조선인을 고용하려는 곳은 없었다. (156쪽)
미싱기름 냄새가 나는 작업장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미싱을 돌리던 어머니, 손톱이 기름에 까맣게 물든 채 반제품을 나르고 차를 운전하시던 아버지. (161쪽)
“저는 한국 국적입니다만, 입사 때 무슨 지장이 있을까요?” “지금까지 한국 국적을 가진 분이 입사한 예는 없읍니다. 귀화한 분은 있읍니다. 다만 전례가 없을 뿐 들어올 수 없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176쪽)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