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어제책 / 숲노래 숨은책 2023.4.3.

헌책읽기 9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998년 무렵, 둘레에서 신영복 님 책을 읽으라고 하기에 문득 집었다가 놀랐습니다. ‘한자말’ 아닌 ‘한문’이 그득하더군요. 《엽서》(너른마당, 1993)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햇빛출판사, 1988)도 영 손이 안 갔습니다. 이분 책을 찾아 주기를 바란 이웃이 많아 커다란 《엽서》이든 처음 나온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든 헌책집에서 찾아 주기는 하되 여러모로 껄끄러웠습니다. 책을 찾아서 건네며 늘 여쭈었어요. “이분 글이 뭐가 좋나요?” “응? 글이 안 좋아?” “이분 글을 누가 읽을 수 있나요?” “왜? 글이 어려워?” “잘 보셔요. 아무리 뜻이 좋다고 해도 먹물붙이가 아니면 읽을 수 없는 이런 글을 어떻게 좋다고 여길 수 있을까요? 아무리 줄거리가 좋다고 한들 이런 낡은 한문결을 그대로 종이에 찍어도 되나요?” “그건 좀 그러네. 그 대목은 생각해 보지 못 했네.” 얼추 스무 해 만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다시 펼치지만, ‘천수고 불감불국(天雖高 不敢不局)’이라느니 ‘막견어은 막현어미(莫見於隱 莫顯於微)’라느니 ‘일우(一隅)’나 ‘필신기독(必愼其獨)’이나 ‘모필 서간문(毛筆書簡文)’이라느니, 누가 읽으라고 쓴 글인지 모르겠습니다. 중국스럽고 일본스러운 낡은 말씨를 안 버린다면, 이 나라 이 땅 이 터 이 마을을 새롭게 가꾸면서 어린이한테 물려주는 길을 어질거나 슬기롭거나 참하거나 아름답게 일구지 못 하겠다고 느낍니다. 더구나 ‘구정·설’이란 낱말을 나란히 쓰면서 ‘민속의 날’이란 이름을 나무라는 대목은 좀 어이없습니다.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던 노태우만 겨레얼이 빠진 짓일까요? ‘신정·구정’이라는 뜬금없는 한자말이야말로 겨레얼이 빠진 먹물잔치 아닐까요? 책이름에 깃든 ‘-으로부터의 + 사색’은 그냥 일본말입니다. 우리말이 아닙니다. 우리말 ‘생각’을 쓸 생각이나 엄두나 마음이나 빛이나 넋이나 얼을 틔우지 않는다면, 아무리 뜻만 좋은 글을 쓰더라도 스스로 굴레(감옥)에 갇히고 이웃도 가두는 셈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햇빛출판사, 1988.9.1.첫/1993.6.1.중판1쇄)



천수고 불감불국(天雖高 不敢不局), 하늘이 비록 높아도 머리룰 숙이지 않을 수 없으며, 막견어은 막현어미(莫見於隱 莫顯於微), 아무리 육중한 벽으로 위요(圍繞)된 자리라 하더라도 더 높은 시점에 오르고 더 긴 세월이 흐르면 그도 일식(日食)처럼 만인이 보고 있는 자리인 것을…… 저에게 주어진 이 작은 일우(一隅)가 비록 사면이 벽에 의하여 밀폐됨으로써 얻어진 공간이지만, 저는 부단한 성찰과 자기부정(自己否定)의 노력으로 이 닫힌 공간을 무한히 열리는 공간으로 만들어 감으로써 벽을 침묵의 교사로 삼으려 합니다. 필신기독(必愼其獨), 혼자일수록 더 어려운 생각이 듭니다. (227쪽/1977.10.15.)


그뿐만 아니라 어머님께서 전에 써보내 주시던 모필 서간문(毛筆書簡文)의 서체는 지금도 제가 쓰고 있는 한글 서체의 모법(母法)이 되어, 궁체(宮體)와는 사뭇 다른 서민들의 훈훈한 체취를 더해 주고 있읍니다. 어머님은 붓글씨에 있어서도 저의 스승인 셈입니다. (280쪽/1983.9.21.)


오늘은 구정입니다. 달력은 29일 밑에다 ‘민속의 날’이라 적어 놓아서 설이란 이름에 담기어 오던 민중적 정서와 얼이 빠져버리고 어딘가 박제(剝製)가 된 듯 메마른 느낌을 금치 못하게 합니다. (296쪽/1987.1.29.)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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