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우리말꽃 / 숲노래 말넋
말꽃삶 9 구체적
오늘날 우리가 쓰는 숱한 말은 ‘아직 얼마 안 된 말씨’이기 일쑤입니다. 2000년을 살아가는 사람들 말씨는 1900년을 살던 사람들 말씨하고 더없이 달라요. 1800년을 살던 사람들 말씨하고 1900년을 살던 사람들 말씨는 조금 다르겠지만 이럭저럭 비슷할 만하고, 1700년이나 1600년이나 1500년을 살던 사람들은 1900년을 살던 사람하고 이럭저럭 생각을 나눌 만하다고 느낍니다. 1500∼1900년을 살아간 사람들은 말씨가 만날 수 있되, 2000년 사람들 말씨하고는 만나기 어려워요.
더 들여다보면, 2000년을 살아가던 사람하고 2010년을 살아가던 사람하고 2020년을 살아간 사람하고도 어쩐지 울타리가 있습니다. 1990년이나 1980년으로 거스르면 더더욱 울타리가 있어요.
더 살피면, 2030년이나 2040년을 살아가는 사람들 말씨는 2020년을 살아간 사람들 말씨하고 제법 다를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삶터가 바뀌는 만큼 말씨가 확 바뀌고, 살림살이가 달라지는 만큼 말씨는 훅훅 달라집니다.
구체적(具體的) : 1. 사물이 직접 경험하거나 지각할 수 있도록 일정한 형태와 성질을 갖추고 있는 2. 실제적이고 세밀한 부분까지 담고 있는
국립국어원 낱말책은 ‘구체적’이라는 낱말을 이처럼 풀이합니다만, 뜻풀이가 하나도 안 쉽습니다. 어쩌면 뜻풀이부터 두루뭉술합니다.
ぐたい-てき[具體的] : はっきりとした實體を備えているさま。個個の事物に卽しているさま。⇔ 抽象的。
일본 낱말책에서 ‘具體的’을 찾아보면 “뚜렷한 실체를 갖춘 모양. 개개의 사물에 빠져 있는 모양”으로 풀이합니다. 오늘 우리나라에서 쓰는 ‘구체적’은 무늬는 한글이되 알맹이는 일본말이라고 할 만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엮거나 지은 낱말이 아닌, 일본이 총칼을 앞세워 쳐들어오던 즈음 스며서 퍼진 말씨예요.
서슬퍼런 그날(일제강점기)이 지나갔어도 ‘구체적’이란 일본 말씨는 이 나라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글힘을 쥔 글바치·벼슬아치·나라님은 일본 말씨를 그대로 붙잡았습니다. 우리 마음을 우리 말글로 담거나, 우리 살림을 우리 말글로 옮기거나, 우리 삶터를 우리 말글로 그리려는 생각을 일으키지 못 했어요.
구체적 모습 → 속모습 / 제모습 / 온모습
구체적 사례 → 보기 / 낱낱 보기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면 ← 이를테면 / 보기를 들면
무엇이 ‘구체적’일까요? 낱낱이 낱말을 살피지 못 하면서 뜬구름을 잡는 마음으로 쓰는 숱한 일본 말씨 가운데 하나일 ‘구체적’이지 않을까요? 뚜렷하게 밝힐 줄 모르고, 환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뭉뚱그리는 엉성한 말씨인 ‘구체적’이지 않나요?
구체적 대안 → 뚜렷한 길 / 또렷한 길
구체적 경위를 밝히다 → 까닭을 하나씩 밝히다
구체적 근거가 없다 → 따로 들지 못하다 / 밑바탕이 없다
콕 집어서 말하면 됩니다. 우리말뿐 아니라 온누리 모든 말은 다 콕 집어서 가리킵니다. 이 뜻도 담고 저 뜻도 나타내는 말이라고 에두를 일이 없어요. 이 자리에서는 이 뜻으로 쓸 말이요, 저 자리에서는 저 쓰임새로 다룰 말입니다.
꾸밈없이 쓸 말이고, 구석구석 짚을 말입니다. 여러모로 헤아리면서 나눌 말이고,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서 주고받는 말이에요.
구체적인 내용 → 낱낱 이야기 / 여러 이야기 / 속이야기 / 알맹이 / 속살
구체적으로 말하다 → 낱낱이 말하다 / 차근차근 말하다 / 뚜렷이 말하다
구체적인 부분까지 논의하다 → 하나하나 따지다 / 작은 곳까지 다루다
둘레에서 일본 말씨 ‘구체적’을 어느 자리에 쓰는지 하나씩 그러모으면서 손질을 해보는데, 이동안 여러모로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2000년을 살거나 2020년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1950년이나 1900년이나 1850년이나 1700년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어느 낱말을 혀에 얹어서 ‘구체적’이란 일본 말씨로 가리킬 뜻을 폈을까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어요.
골똘히·곰곰이·꼼꼼히·촘촘히·빈틈없이
낱·낱낱·낱낱이
하나·하나하나·하나씩
콕·조금씩·조곤조곤
뚜렷이·환히·제대로·깊이
속·속깊이·속살·속알·알맹이
온·제·보기
고스란히·그대로·있는 그대로
찬찬히·차근차근·차분히·지긋이
여러·여러모로·여러 가지·따로·딱히
꾸밈없이·숨김없이·남김없이·구석구석
아주·무척·매우·몹시·잘
더·더욱더·더욱·좀더
덧붙이다·보태다·붙이다
그러니까·곧·이른바·이를테면
막상·정작
삶·살림
“구체적으로 피부에 와닿는”이라면 수수하게 “살갗에 와닿는”이나 “살가운”이라 하면 됩니다. “구체적인 생활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라면 수수하게 “삶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라 하면 되어요. 살갗에 와닿을 적에는 이미 ‘낱낱(구체적)’으로 ‘깊게’ 닿는다는 소리입니다. ‘삶(생활)’에 뿌리를 내린다고 할 적에도, 삶이란 언제나 ‘낱낱’으로 ‘깊’고 ‘또렷’하고 ‘환하’게 드러나지요.
강수량은 구체적인 모델을 설계하기가 굉장히 까다롭지만
→ 비가 얼마나 내릴지는 헤아리기 몹시 까다롭지만
→ 비가 얼마나 올는지 내다보기가 참 까다롭지만
“구체적으로 입증하지 못하는”이라면 수수하게 “꼼꼼히 밝혀내지 못하는”이나 “빈틈없이 밝히지 못하는”이라 하면 됩니다.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는 게 좋다”는 “틀을 잘 세워야 좋다”라 하면 되지요. 꼼꼼히 하고, 곰곰히 하고, 골똘히 하면 됩니다. 잘 세우고, 하나하나 세우고, 빈틈없이 세우고, 찬찬히 세우고, 차근차근 세우면 되어요.
내려놓아라. 방하착放下着. 널리 알려진 이 불교용어가 나에게 구체적으로 찾아와 힘을 발휘한 것은
→ 내려놓아라. 내려놓아라. 널리 알려진 이 불교말이 나한테 깊이 찾아와 힘을 낸 때는
→ 내려놓아라. 널리 알려진 이 불교말이 나한테 살갗으로 찾아와 힘을 낸 때는
우리가 쓸 말이란, 삶을 그릴 말입니다. 우리가 주고받을 말이란, 서로 마음을 나타낼 말입니다. 어느 낱말을 골라서 써도 나쁘지는 않되, 우리 삶터는 우리가 살아온 이 땅에서 스스로 살림을 지은 마음하고 손길로 여민 낱말로 그리거나 나타낼 적에 어울립니다. 때로는 이웃말(외국어)을 들여올 수 있을 텐데, 처음에는 이웃말을 들이더라도, 우리 나름대로 녹여내어 새롭게 우리 말씨를 일굴 적에 넉넉하고 즐거우면서 쉽겠지요.
지금은 뜻이 달라진 말에 관해 구체적으로는 거의 알 수가 없다
→ 이제는 뜻이 달라진 말을 거의 알 수가 없다
오래도록 쓴 말씨에서 귀띔을 얻을 수 있어요. 누구나 쓰는 말씨에서 수수께끼를 풀 길을 엿볼 만합니다. 흔하게 쓰는 말씨에서 문득 깨달을 만해요.
삶을 보면 말이 태어납니다. 살림을 지으면 말이 깨어납니다. 삶하고 살림이라는 길을 조곤조곤 다스리면서 차근차근 넋을 지피는 슬기로운 마음을 말 한 마디에 담기를 바랄 뿐입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