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 낙서 수집광
윤성근 지음 / 이야기장수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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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숲노래 책빛 2023.3.20.

인문책시렁 294


《헌책 낙서 수집광》

 윤성근

 이야기장수

 2023.2.8.



  《헌책 낙서 수집광》(윤성근, 이야기장수, 2023)을 읽었습니다. 아직도 한자말 ‘낙서’를 그냥 쓰는 분이 많습니다만, 우리말로 보자면 ‘쪽글·조각글’이나 ‘놀이글·말놀이’이거나 ‘글꽃’이거나 ‘끄적임·깨작질’입니다. 책을 읽고서 깨작거리는 사람이 있으나, 차곡차곡 쪽글을 남기는 사람이 있고, 이모저모 생각을 밝혀 글꽃을 피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난날에는 한자말로 여러 가지 뜻을 나타냈다고 여기지만, 곰곰이 본다면 숱한 삶과 살림을 한자말로 아무렇게나 묶거나 눌렀다고 여길 만합니다.


  책을 사서 읽는 사람은 왜 글을 몇 줄 끄적일까요? 아무 생각이 없다면 적바림하지 않습니다. 글쓴이나 지은이하고 마음이 맞거나 어긋나기에 스스로 생각을 기울여 귀퉁이에 몇 마디를 남깁니다. 새롭게 읽으며 새삼스레 배우기에 문득 생각을 해보면서 이야기를 넣습니다.


  《헌책 낙서 수집광》을 읽으면 《초인생활》이라는 책을 다루기도 하는데, ‘정신세계사’에서 내기 앞서 1978·1985년에 《히말라야 성자들의 초인생활》이란 이름으로 나왔으며, ‘정신세계사’ 판은 처음 새로 낼 적에도 옮김말이 틀렸다는 손가락질을 꽤 받고서 2020년에 새 옮김판을 내놓았으나 어설프거나 엉성한 옮김말씨는 썩 안 가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Life and Teaching of the Masters of the Far East”라는 이름이기에 ‘초인생활’로 옮긴 이름하고는 동떨어져요. 아무래도 일본판을 들여다보며 옮기던 낡은 버릇 탓에 우리말로 옮길 마음을 못 키웠구나 싶습니다. 그러니까 ‘초인생활’이 아닌 ‘깨달은 삶과 가르침’이 무엇인지 짚고 밝히면서 나누려는 줄거리를 담은 책이 ‘초인생활이란 이름으로 나온 책’입니다.


  헌책이라는 이름은 ‘헌 : 손을 댄’을 밑뜻으로 삼습니다. 예부터 ‘새책’이란 말은 잘 안 썼습니다. 딱히 놀랄 일이 아닙니다. 모든 책은 그저 책일 뿐이니, 구태여 ‘새책’이라 안 했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집어삼키고서 책장사를 할 무렵에라야 비로소 ‘新刊·新書’ 같은 한자말이 쏟아졌고, 이 일본스런 한자말을 우리는 아직도 붙잡습니다. 적어도 ‘새책’으로 옮겨야 할 텐데 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왜 굳이 ‘새책’ 같은 낱말을 잘 안 썼을 뿐 아니라, 2023년에 이를 무렵까지 국립국어원 낱말책은 ‘헌책’만 올림말로 삼고 ‘새책’은 올림말이 아닐까요?


  낱말로만 보면 ‘헌책·새책’이 나란히 올림말이어야 하고, ‘헌책집·새책집’처럼 적어야 맞습니다. 아무튼 우리로서는 “모든 책은 그저 책이고, 모든 책은 손길을 닿아서 읽혀야 비로소 책이다.”라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따로 ‘헌책’만 예부터 한 낱말로 삼아서 가리켰고, 가난하던 일제강점기에도 헌책집이 꽤 열었으며, 한겨레싸움(한국전쟁) 한복판에 나라 곳곳에 헌책집이 한꺼번에 잔뜩 태어났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헌책 = 손이 닿은 책 = 손길책’입니다. 손이 닿은 책이란 “읽힌 책”이니, “읽히는 책 = 손길이 닿아 빛나는 책 = 손빛빛”입니다.


  이 얼거리를 안 살핀다면, 언제까지나 ‘헌책은 구질구질하거나 지저분하거나 낡거나 케케묵거나 뒤떨어진 옛날 책’이라는 꼰대스러운 마음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헌책’은 낡은 책이 아닙니다. ‘낡은책 = 줄거리·이야기가 낡은 책 = 지은이 마음이 낡아빠져서 새길을 하나도 안 쳐다보거나 못 알아보는 책’입니다. 종이가 허름하대서 낡은 책이지 않아요. ‘헌책’이란 이름에 붙는 ‘헌’은 ‘한·하늘’하고 맞물리는 말뿌리입니다. ‘헌집·헌옷’을 가리킬 적에 쓰는 ‘헌-’은 모두 “손길을 받아 새롭게 쓰이고 빛나는 살림”을 속뜻으로 품어요. 이러한 말결은 바로 ‘하늘’하고 닮지요. 우리가 올려다보는 하늘은 우리가 늘 ‘새롭게 마시고서 새삼스레 뱉은 숨(바람)’이 하나로 이룬 덩이입니다.


  《헌책 낙서 수집광》은 ‘낙서 수집광’처럼 부러 예스러이 한자말을 여미는 책이름에, 다룬 책이나 줄거리도 조금 예스러운 티가 드러납니다. 그런데 굳이 예스러운 티를 내야 할는지 아리송해요. 모든 책은 책이면서 헌책일 뿐이기에 새책인데, ‘새롭게 읽는 마음’으로만 바라보면 되리라 생각합니다. 굳이 ‘낙서 수집’을 하기보다는 ‘우리 마음을 담아 쪽글을 새로 넣고서 다시 헌책집 책시렁 한켠에 깃들도록 내놓아서 두고두고 되읽히는 책으로 나아가는 길’을 고즈넉히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낙서 수집광’처럼 멋부리는 이름은 그만 내려놓고서, ‘기담 수집’처럼 멋내기는 이제 그만하면서, ‘이야기 찾기’하고 ‘이야기 새로짓기’에 마음을 둘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야기가 흐르기에 책이요 헌책입니다. 이야기가 없이 장사에 마음을 빼앗기기에 새책이자 낡고 고리타분한 꼰대책입니다.


ㅅㄴㄹ


솔직히 내가 상상으로 그리던 초인의 모습도 바로 이렇게 평범한 느낌이다. (46쪽)


사실 이 문장이야말로 책 탕진의 정석이라 부를 만하다. 우선 탕진은 무엇보다 충동적이어야 한다. (177쪽)


사실 사회과학서점에서 책을 싸주던 이유는 책을 보호하기보다는 그 책을 가진 사람을 보호한다는 목적이 컸다. (191쪽)


어린이였을 때 나는 이미 어른이라고 느꼈는데 지금은 어른의 경계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256쪽)


책을 빼앗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살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이 사는 건 얼마나 맥빠지는 일인가. (310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 붙임

: 대학교 앞 인문사회과학서점이 쓴 책싸개는 ‘그 책을 가진 대학생을 보호하는 목적’이 아예 없지는 않았으나, 이 뜻만 있다고 할 수 없고, 이 뜻이 크다고 할 수도 없다. ‘대학교 앞 책집 이름이 깃든 책싸개’는 ‘그 대학 출신임을 자랑하려는 뜻’이 훨씬 컸다. 책싸개는 인문사회과학서점뿐 아니라 ‘대학 구내 서점’에서도 나란히 썼고, 대학 구내 서점은 1950∼60년대에도 있었는데, 그때에도 그 대학 구내 서점은 ‘책싸개’에 ‘대학교 이름’을 큼지막하게 넣었다. 틀린 이야를 함부로 쓰지는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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