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어제책/숲노래 책읽기 2022.12.15.
헌책읽기 1 創作과 批評 44, 1977 여름
푸른배움터를 다니던 열일곱 살에 ‘창작과비평사’란 이름을 비로소 알고, 열여덟 살인 1992년부터 ‘창작과비평’ 새김판(영인본)을 꾸러미로 들여놓고서 읽다가, 낱책으로 나온 낡은 《創作과 批評》을 하나씩 모으곤 했습니다. 새김판으로도 글은 다 읽을 수 있되, 처음 나와 읽히면서 바스락바스락 낡아가는 종이를 쥐면, 지난 한때를 함께 떠올리면서 이야기를 느낄 만하거든요. 《創作과 批評 44, 1977 여름》은 열여덟 살에 진작 챙겨서 읽었고, 《분단시대의 역사인식》도 이무렵에 읽었어요. 강만길 님이 갈무리한 〈한글 창제의 역사적 의미〉를 서른 해 만에 되읽어 봅니다. 1977년이나 1992년에도 해묵지 않은 글이었고, 2022년에도 밝은 글입니다. 다만, 글에 한자가 곳곳에 깃드니 요사이에는 이 대목이 걸려서 못 읽을 분도 있으리라 봅니다. 강만길 님도 ‘한글 창제’라 했으나 ‘훈민정음 창제’로 적어야 올바릅니다. 세종 임금은 ‘한글’이 아닌 ‘훈민정음’을 내놓았습니다. ‘한글’이란 이름은 일제강점기 즈음 주시경 님이 처음 지은 글이름이요, 우리나라가 총칼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밑틀을 ‘말글’로 삼아서 한뜻을 펴려는 이름입니다. 세종 임금은 ‘훈민정음’이란 이름을 내세워 ‘새나라 조선’이 ‘옛나라 고려’하고 어떻게 다른가를 들려주면서 임금틀(왕권)을 단단히 받치려 했습니다. 굳이 ‘고려’란 이름과 틀을 모조리 버리고서 중국을 섬기는 ‘봉건사대주의 조선’으로 뻗어나가는 길을 사람들한테 차근차근 알리려 했어요. 우리는 늘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날 벼슬꾼(정치꾼)이 “국민 여러분을 위하여”라 말하기에 오늘날 벼슬꾼이 “수수한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여겨도 되겠습니까? 위아래(신분·계급·권력)가 무시무시하던 조선에서 ‘들꽃사람(백성)’은 ‘사람값’을 받지 못 하는 종살이(노예생활)였습니다. 위(권력자)에서는 ‘듣기 좋은’ 말을 폅니다. 그러나 위에서 듣기 좋은 말을 펼 수밖에 없도록 사람들 스스로 들불을 일으켜 왔습니다.
《創作과 批評 44, 1977 여름》(편집부, 창작과비평사, 1977.6.5.)
ㅅㄴㄹ
15세기에 와서야 고유한 글을 가지지 못한 국가의 체면 문제가 생각되게 되었다는 점이 석연치 않다. 고대국가 성립시기에 있어서의 정복전쟁의 영웅적 기록이 모두 한자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만두고라도 …… 흔히 사대주의가 본격화한다고 말하는 이조 초기에 와서 왜 국가적 체면을 생각하고 우리글을 만들게 되었는가 하는 점에 의문이 있다. (305, 306쪽)
한글의 창제도 새 왕조의 지배권력이 백성들에게 제시한 이익조건 중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결코 치자층의 자애심이 바탕이 된 것이 아니라 백성세계가 스스로의 자의식을 높여감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戰利品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09쪽)
지배목적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한글은 창제 당초부터 백성들을 대상으로 이조왕권의 정당성과 존엄성을 고취하는 데 사용되었다. 한글로써 무엇보다 먼저 ‘龍飛御天歌’를 지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 한편 15세기는 이조적인 지배질서를 확립시키는 일이 급선무이던 때였다. 이 때문에 관료층은 물론 일반 백성들까지 고려시대까지의 불교적인 생활양식을 청산시키고 유고적 생활규범으로 철저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것을 위하여 백성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을 만들고 그것으로 각종 儀禮書를 지어 퍼뜨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310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