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조정권 (2022.10.18.)

― 서울 〈신고서점〉



  서울 인왕산 곁 마을배움터에서 하루를 가꾸는 푸름이를 만나고서 한두 시간쯤 책을 살필 짬이 납니다. 〈신고서점〉을 찾아갑니다. 느긋이 책빛을 머금고서 광화문으로 옮기려 했는데, 책집에 깃든 지 얼마 안 되어 따르릉 울립니다. 늦은낮에 뵙기로 한 분이 벌써 그쪽에 닿았답니다.


  서둘러 자리를 옮겨야 하지만 5분만 스스로 누리기로 하면서 골마루를 살살 거닙니다. 예전에 이미 읽은 책이지만 “이런 겉그림이었나?” 싶어 집어드니 글님이 조정권(1949∼2017) 님한테 드린 손글씨가 있습니다. 노래책 한 자락에 남은 손글씨를 보고서 다른 노래책도 뒤적이니 여럿에 글님 손글씨가 있군요.


  여러 해 앞서 흙으로 돌아간 조정권 님이 지내던 살림집이라든지 일터 한켠에 쌓였다가 내놓았구나 싶습니다. 사람은 모두 다르니 서로 다르게 하루를 살아내고서 이 하루를 다 다른 눈길로 가다듬은 다음 다 다른 손길을 살려서 글을 씁니다. 모든 책은 다르고, 모든 손글씨는 다릅니다. 우리말 ‘손글씨’란 낱말을 쓰는 분이 있지만 영어 ‘캘리그래피’를 쓰는 분이 있는데, ‘이쁜글씨’나 ‘바른글씨’보다 ‘그저 손글씨’를 사랑하는 이웃님이 늘기를 바랍니다.


  잘 쓴 글씨를 따라해야 하지 않아요. 훌륭하다고 여길 만한 글을 베껴쓰기(필사)해야 하지 않아요. 잘 쓴 글씨이건 훌륭한 글이건, 그저 ‘읽고서 새긴 다음 우리 나름대로 삭인 새글씨에 새글로 풀어낼’ 적에 서로 아름답습니다.


  우리말 ‘베끼다·배우다’는 비슷하되 다릅니다. 둘 모두 지켜보고서 따라가는 몸짓을 그리지만, ‘베낄’ 적에는 그냥 머물거나 맴도는 결이요, ‘배울’ 적에는 삭이고 가다듬어 우리 손길이나 몸짓을 살리는 결입니다.


  풀을 죽이려고 뿌리기에 죽임물입니다. 죽임물을 뿌려서 살아날 풀은 없습니다. 이 풀죽임물은 풀뿐 아니라 땅을 죽이고, 땅밑으로 스며들면 냇물이며 샘물까지 죽이고, 나중에는 갯벌하고 바다까지 죽입니다. 이와 달리, 바다에서 피어난 구름이 빗물로 바뀌어 내릴 적에는 들숲을 모두 살리고 먼지를 말끔히 씻어 줍니다. 빗물 바닷물은 살림물입니다.


  풀(잡초)이 보기 싫다면서 죽임물(농약)을 뿌리면 얼핏 반듯하거나 가지런해 보일 테지만, 숨결이 사라집니다. 베껴쓰기(필사)나 예쁜글씨(캘리그래피)는 ‘다 다른 숨결을 죽이려는 농약’이지 싶어요. 어깨동무나 살림짓기로 가기를 바랍니다. 자랑글이 아닌 살림글로 수수하면서 투박하게 오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아가기를 빕니다.


ㅅㄴㄹ


《샘그림문고 1 김영숙 만화작법》(김영숙, 샘, 1988.5.15.)

《햄버거에 대한 명상》(장정일, 민음사, 1987.3.30.)

《진흙소를 타고》(최승호, 민음사, 1987.4.15.)

《이 강산 녹음 방초》(박종해, 민음사, 1992.3.30.)

《내 무거운 책가방》(교육출판 기획실 엮음, 실천문학사, 1987.4.20.첫/1988.8.30.재판)

《풀빛판화시선 5 노동의 새벽》(박노해, 풀빛, 1984.9.25.)

《먼 바다》(박용래, 창작과비평사, 1984.11.5.첫/1988.7.5.재판)

《白衣從軍》(김성영, 횃불사, 1979.4.15.)

《三中堂文庫 356 뻐꾸기 둥지위를 날아간 사나이 (下)》(켄키지/김진욱 옮김, 삼중당, 1977.9.10.첫/1977.12.20.중판)

《한권의책 21 백범 일지》(김구, 학원사, 1986.7.1.첫/1990.10.31.8벌)

《성남지역실태와 노동운동》(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엮음, 민중사, 1986.7.10.)

《왜 그리스도인인가》(한스 큉/정한교 옮김, 분도출판사, 1982.2.22.첫/1983.4.20.재판)

《한국의 세시풍속과 민속놀이》(장주근 글·이인실 그림, 대한기독교서회, 1974.11.30.

《통일교실》(민성일, 돌베개, 1991.8.1.)

《丸 MARU 8月特大號 421호》(高野 弘 엮음, 潮書房, 1981.8.1.)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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