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숲노래 마음노래 . 건널목
부릉이가 없던 때에는 건널목이 없지. 칙폭이가 없던 때에도 건널목이 없어. 쇳덩이가 더 빠르게 달리려는 곳에 건널목이 있어. 걷는 사람은 멈추라면서 건널목을 둔단다. ‘걸어가라’는 건널목이 아니야. 부릉부릉 길을 채우면서 ‘사람을 밀어내는 구실’인 건널목이야. 쇳덩이가 길을 차지하지 않던 무렵에는 누구나 길을 호젓이 걸으면서 바람을 마시고 풀벌레노래·새노래를 듣고 해바라기·별바라기로 어우러졌어. 곰·여우·늑대·범도, 지렁이·사마귀·메뚜기·땅강아지도 같은 길을 누렸어. 이제 길에 누가 있니? 길에 사람이 있니? 길에 쇳덩이만 있지 않아? 골목에서 공을 차거나 노는 어린이가 있니? 골목에서 모임을 하거나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이 얼마나 있니? 서울을 보면, 버스·전철에 사람이 물결치잖아? 이 사람물결 사이에 파리나 벌이나 모기라도 있니? 잠자리나 나비나 무당벌레가 있니? 오직 사람만 빼곡한 채 서로 밀고 밀리는 판이지 않아? 시골은 어떨까? 개구리나 풀벌레가 깃들 자리는 얼마나 있니? 새가 둥지를 틀거나 거미가 집을 지을 틈이 있니? 서울도 시골도 ‘삶터·살림터’가 아닌 ‘죽음터·사슬터’이지는 않아? 무엇이 길을 건널 수 있을까? 누구 발걸음을 막아설까? 파란하늘하고 푸른들을 마음에 담을 짬도 없지만, 파란하늘하고 푸른들을 진작 밀어없애지는 않았니? 어디로 가는 길이니? 무슨 마음이 되어 건너가려고 하니? 네가 선 곳은 누가 드나들고 어떤 이야기가 흐르니? 너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쇳덩이 앞에 서니? 2022.10.24.달.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