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글 + 그림 (2022.5.16.)

― 광주 〈ㅊ의 자리〉



  푸른배움터를 마칠 무렵까지 ‘우리말처럼 보이는 적잖은 말’은 우리말이 아니고 일본말인 줄 몰랐습니다. 둘레 어른들은 이 대목을 안 가르쳤고, 흘려넘겼고, 배움수렁(입시지옥)에 어린이·푸름이를 몰아넣기만 했습니다. 열아홉 살에 서울을 비로소 만나고 여러 또래나 윗내기를 만나면서 ‘우리나라에서 서울 아닌 데에서 사는 사람은 다 바보일 수 있겠다’고 느꼈습니다. 모두 서울로 쏠리기도 했지만, 서울내기처럼 숱한 책을 마음껏 읽을 터전은 다른 고장에 없더군요.


  큰고장을 아주 떠나 시골에서 살아가며 돌아보노라면, ‘서울에서는 종이꾸러미로 배우는 길이 가장 넓을’ 수는 있어도 ‘종이가 온 숲을 배우는 길은 가장 막히고 좁’다고 느껴요.


  총칼로 우리나라로 쳐들어와서 짓밟고 괴롭힌 일본을 나무라거나 미워하는 분은 많되, 일본사람이 지어서 이 나라에 심은 일본 한자말이나 일본말씨를 하나하나 털어내는 분은 없습니다. ‘적지도 않고 없’습니다. 다들 그냥 씁니다. ‘사회·문화·정치·학교’ 같은 한자말도 일본사람이 머리를 굴려 엮은 한자말입니다. ‘도서관·서점·출판사’ 같은 한자말조차 일본사람이 퍼뜨린 한자말입니다.


  총칼굴레(일제강점기)에서 홀로서기(독립운동)를 꿈꾼 분들은 일본말 아닌 우리말을 되찾으려 했고, 몰래 한글을 살리면서 지켰고, 우리 삶과 넋과 생각을 담을 우리말을 새로 지으려 했습니다.


  그냥그냥 ‘만화책’이란 일본스런 한자말을 써도 안 나쁘지만, 굳이 ‘글 + 그림’이라는 얼개를 꽃처럼 피우는 결을 헤아리면서 ‘그림꽃책’처럼 새말을 엮어 봅니다. 그림책하고 그림꽃책(만화)은 닮되 달라요. 그림꽃(만화)을 안 읽는 사람은 그림꽃이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가를 모를 뿐 아니라, 알 마음조차 없지 싶습니다만, 아름다운 그림꽃을 알아보고 손에 쥐기를 바라는 새 이름입니다.


  광주에서 〈일신서점〉하고 〈광일서점〉을 들르고서 〈ㅊ의 자리〉로 찾아옵니다. 책집이면 그냥 가면 되리라 여겼는데, 미리 여쭈어야 한다더군요. 일본 한자말로 ‘예약제’라고 합니다. 다음에는 미리 여쭙기로 하고서 조용히 둘러봅니다.


  가을은 모두 살찌우는 볕이고, 봄은 모두 깨우는 빛입니다. 겨울은 모두 꿈꾸는 밭이고, 여름은 모두 노래하는 별입니다. 철마다 다른 결을 헤아립니다. ‘이름없는(무명)’ 사람은 없듯, ‘들꽃같은’ 사람이나 ‘들풀같은’ 사람이 있고, ‘바다같’거나 ‘하늘같’거나 ‘숲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ㅊ이라는 닿소리를 혀에 얹으며 ‘철’을 생각합니다. 철마나 찬찬히 착하게 초롱초롱 읽습니다.


ㅅㄴㄹ


《죽고 싶지만 살고 싶어서》(장화와 열 사람, 글항아리, 2021.9.3.)

《숨을 참는 아이》(뱅상 자뷔스 글·이폴리트 그림/김현아 옮김, 한울림스페셜, 2022.3.21.)

《아무튼, 순정만화》(이마루, 코난북스, 2020.2.1.)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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