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걷는빛 (2022.6.3.)
― 수원 〈책 먹는 돼지〉
배우는 길이 끝난다면, 늙고 낡아서 죽음으로 가는 끝장이란 뜻입니다. 늘 배우는 사람이라면, 늙거나 낡는 일이 없어 늘 삶을 새롭게 비추는 오늘입니다. 배움길하고 죽음길 사이가 무엇이라고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둘레를 보며 절로 느낍니다. 고개숙여 배우거나 잘잘못을 다스리는 사람은 환하고, 고개숙일 줄 모르거나 잘잘못을 등지는 사람은 어두워요.
수원 세류나루에서 내려 걷습니다. 수원나루부터 세류나루 사이는 부릉길이 매우 넓은데, 부릉거리는 큰길 안쪽 골목길은 호젓합니다. 햇볕이 고루 비추고, 바람이 알맞게 드나들어, 마을이 꽃빛하고 풀빛이 어우러집니다. 지붕보다 웃자란 나무가 곳곳에 있고, 새가 내려앉아 노래합니다.
새가 부딪히지 말라고 높다란 담에 새무늬를 새기는 데가 늘어납니다만, 풀꽃나무가 우거지는 터로 가꾸면 될 일입니다. 새가 내려앉아 날개를 쉬면서 벌레잡이를 할 풀숲이 있으면 걱정거리가 없어요. 그러나 이 나라 벼슬꾼이나 글꾼은 새바라기도 아니고 숲바라기도 아닌 터라, 자꾸 잿빛으로 올릴 뿐이요, 서울타령입니다.
빛살을 느끼고 발자국을 느끼면서 〈책 먹는 돼지〉에 닿습니다. 다른 마을책집도 비슷합니다만, 부릉이를 끌고 찾아가면 마을빛을 못 느끼니, 부디 마을책집에는 걸어서 찾아가기를 바랍니다. 마을책집에는 책을 더 많이 사러 가지 않습니다. 마을책집에서 대단하거나 놀랍거나 훌륭한 책을 만나야 하지 않습니다. 이름높은 책은 마을책집하고 안 맞습니다. 걷는 손길을 담고, 새랑 숲 곁에 있는 책이야말로 마을책집하고 맞습니다.
서로 동무라면 어떻게 어울리면서 함께 기쁘고 배부르면서 새롭게 놀 적에 까르르 웃음꽃이 피어나는지 알아요. 사람은 새랑 동무인가요? 사람은 풀벌레랑 이웃인가요? 하나씩 셈을 해서 똑같이 놓는 나눔도 가끔 있을 테지만, 배고프고 가난한 이한테 더 내주는 길이 즐거우며 사랑스러운 나눔이라고 생각해요.
지음이(작가)를 하고 싶다면, 스스로 삶이며 살림이며 사랑을 짓는 하루를 누리면 됩니다. 무엇보다 모든 삶하고 살림하고 사랑은 숲에서 깨어나니, 숲이 스스로 짓는 결을 스스럼없이 마주하고 맞아들여서 녹여내면 넉넉합니다. 꾸미는 글이나 억지로 채우는 글은 ‘지음’이 아닌 ‘꾸밈·눈속임·베낌’에서 멈출 뿐이에요. ‘눈치 아닌 눈길’을 가다듬으면, 누구나 저마다 즐겁고 슬기로이 지음빛이 될 만합니다. 마을을 품으면 마을지음이로 섭니다. 숲을 담으면 숲지음이로 웃습니다. 바다를 안으면 바다지음이로 너울거립니다. 누구나 지음이로 가기를 바라요.
ㅅㄴㄹ
《이이효재》(박정희, 다산초당, 2019.9.9.)
《나선》(장진영, 정음서원, 2020.10.12.)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너에게》(권지영 글·소중애 그림, 단비어린이, 2022.1.8.)
《옥춘당》(고정순, 길벗어린이, 2022.1.15.)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