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잿빛 한복판 (2022.9.27.)

― 인천 〈그루터기〉



  한낮에 흘린 땀을 아침저녁 서늘한 가을바람이 부드러이 씻어주는구나 싶은 나날입니다. 한가을은 ‘떠나가’거나 ‘돌아가’는 한복판입니다. 가을이란 ‘가는’ 철입니다. 이제 흙으로 가고, 제비랑 꾀꼬리가 바다를 건너 따뜻한 고장으로 가고, 풀벌레가 노래를 마치고서 흙으로 가서 쉬는 철입니다. 찬바람으로 가면서 꿈나라로 가려는 숲짐승이며 헤엄이가 많은 철이에요.


  돌아가려고 떠납니다. 덧없으니 씨앗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사라지기에 문득 싹이 트면서 환하게 빛납니다. 헤어지기에 만나고, 등돌리는 사람이 있기에 손을 맞잡는 동무를 사귀고, 눈물을 함박만큼 쏟으니 활짝 웃음지을 하루를 짓습니다.


  봄여름가을겨울 네 철 가운데 어느 철이 좋거나 나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다 다르게 빛나는 철입니다. 겹겹 품는 겨울이요, 새롭게 보는 철이요, 하늘이 활짝 열리는 철입니다.


  서두를 일이 없고, 바빠야 할 일이 없습니다. 아기는 서둘러 말길을 트거나 일어서서 달려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서둘러 글을 읽어내거나 더 높이 배움터를 다녀야 하지 않습니다. 새는 더 빨리 노래해야 하나요? 바람은 더 빨리 불어야 하나요? 해는 더 빨리 뜨고 져야 할까요?


  서둘러 읽어야 할 책이 없고, 여태 몰랐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 어리석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맞이해서 누리고 사랑하고 즐기려는 책입니다. 여태 몰랐으니 스스럼없이 웃으면서 배우고 눈물로 지난날을 뉘우치기도 하고 고개숙이기도 합니다.


  고흥을 떠난 시외버스를 안산에서 내립니다. 수인선 전철로 느긋이 인천으로 건너옵니다. 인천시청 앞을 해바라기를 하며 걷습니다. 그림책집 〈그루터기〉로 찾아갑니다. 하늘을 찌를듯이 솟은 잿빛마을(아파트단지)에 찾아갈 일이 없으나, 바로 이 잿빛마을에 숲빛노래를 씨앗 한 톨로 심으려는 이웃님이 있습니다.


  어쩌면 책집은 서울(도시) 한복판이 어울려요. 풀꽃나무를 밀어내거나 짓밟은 서울이니, 이곳에서 숲빛을 헤아리며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어른으로 살아갈 밑힘이나 슬기를 그림책이며 어린이책이며 만화책으로 되새길 만해요. 시골에서도 종이책은 아름다운데, 이보다는 풀꽃나무를 고스란히 마음책으로 삼으면 넉넉합니다.


  우람한 나무이던 나날에도, 줄기를 내주어 둥치로 남은 나날에도, 언제나 푸른자리를 이루는 든든한 밑동이 그루터기라고 느낍니다. 이 낱말을 새삼스레 돌아보면서, 그림책을 나누는 마음을 헤아리는 자리란 우리한테 어떤 숨빛일까 하고 생각하니, 그림책집 〈그루터기〉가 걸어가는 길이 환하게 보입니다.


ㅅㄴㄹ


《수짱과 고양이》(사노 요코/황진희 옮김, 길벗어린이, 2022.9.25.)

《가을의 스웨터》(이시이 무쓰미 글·후카와 아이코 그림/김숙 옮김, 주니어김영사, 2020.9.1.첫/2021.9.2.2벌)

《호텐스와 그림자》(나탈리아·로렌 오헤라/고정아 옮김, 다산기획, 2018.12.20.)

《미카의 왼손》(나카가와 히로노리/김보나 옮김, 북뱅크, 2022.8.10.)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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