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책집지기 자리 (2022.8.24.)
― 순천 〈책방 심다〉
서울·부천·인천을 돌며 편 이야기꽃을 마치고서 고흥으로 돌아가는 날입니다. 이제 쉼철(휴가시즌)은 거의 끝이라지만, 서울서 고흥 돌아가는 시외버스는 빽빽합니다. 어찌할까 하다가 영등포로 전철을 타고 가서 기차로 순천으로 달립니다. 느릿느릿 기차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눈을 붙입니다.
한낮에 순천에 닿습니다. 오랜 길손집이 늘어선 골목을 걸으며 〈책방 심다〉로 갑니다. 오랜 길손집은 바깥담에 번쩍이는 불빛을 달지 않습니다. 길가에 꽃그릇을 놓거나 들꽃이나 넝쿨이 자라도록 담을 내어줍니다.
골목마을은 골목집이 서로 햇볕을 나누어요. 몇몇 집만 해를 차지하지 않습니다. 이러면서 자그마한 빈터에 꽃씨를 심거나 나무를 가꾸지요. 이와 달리 높다랗게 솟는 잿빛터(아파트단지)는 서로 해를 나누지 않아요. 따로 쉼터를 꾸미면서 꽃뜰을 가꾸기는 하되, 마을사람이 손수 꽃뜰지기 노릇을 하지는 않습니다.
마을에 깃든 책집은 마을 빈터에 들꽃이 자라도록 북돋우고 들빛을 나누려는 골목집하고 닮습니다. 더 높거나 이름난 책보다는, 마을살림을 헤아리는 책을 조촐히 건사하지요. 마을마다 옹기종기 꽃뜰이 있으면 나긋나긋 싱그러이 풀빛을 나눕니다. 마을마다 마을책집이 있으면 느긋느긋 즐거이 책빛을 나눌 테지요.
나라에서는 고을마다 배움터(학교)를 세워서 우리가 배울 이야기를 차근차근 폅니다. 아이들은 배움터를 다니거나 스스로 책을 찾아 읽거나 어른 곁에서 함께 살림을 돌보면서 삶을 돌아보고 익혀요. 빌려서 읽는 책을 건사하는 책숲(도서관)은 여러 갈래 책으로 길잡이 노릇입니다. 사들여서 읽을 책을 펼치는 책집은 스스로 눈길을 밝혀서 오늘을 새롭게 헤아리도록 북돋우는 길동무 구실입니다.
책숲만으로는 책밭을 넓게 가꾸지 못 해요. 새로 나오는 책뿐 아니라, 오랜 아름책을 알아보고 알리는 책일꾼은 바로 책집지기예요. 책숲지기(도서관 사서)는 마을사람이 책을 넓고 깊이 읽고 생각하도록 돕는 몫이라면, 책집지기(책방 운영자)는 마을사람이 스스로 사랑을 가꾸는 길에 동무이면서 길잡이 노릇을 합니다.
오늘 〈책방 심다〉에는 최원형 님이 마실을 왔습니다. 순천 언저리로 이야기마실(강연여행)을 오신 듯합니다. ‘생태·환경’ 이야기를 글이며 말로 꾸준히 펴시는데, 앞으로는 ‘숲·시골’ 이야기를 펴면 한결 나으리라 생각해요. 낱말이 다르면 삶도 눈길도 이야기도 달라요. ‘생태·환경’이란 일본스런 한자말에 머물면 ‘서울에서 보는 눈’에서 맴돕니다. ‘숲·시골’이란 수수하고 쉬운 우리말을 쓸 적에는 비로소 ‘시골 어린이 눈’으로 온누리하고 별누리를 바라볼 수 있어요.
ㅅㄴㄹ
《주업은 농사 부업은 의사》(손세호, 심다, 2021.8.15.)
《14마리의 빨래하기》(이와무라 카즈오/박지석 옮김, 진선아이, 2022.7.26.)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