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2022.8.19.
수다꽃 21 할아버지한테
우리 아이들 일산 할아버지가 다시 돌봄터(병원)로 실려갔다. 어쩌면 이제 아이들 일산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몸을 내려놓고서 넋으로 돌아가시리라 느낀다. 아이들 일산 할머니한테 전화를 건다. 요새는 돌봄터에 딱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고, 아픈이(환자) 곁에서 보살피는 사람은 돌봄칸(병실)에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다고 한다. 아픈이가 말끔히 나아서 같이 나오거나, 아픈이가 죽어서 나와야 비로소 나올 수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 참 대단한 나라로구나 하고 느꼈다. 가시아버지(장모)한테 여쭐 말씀은 몇 가지 있다. “첫째, 여태까지 가시아버지가 잘못한 일도 잘 하신 일도 없답니다. 그저 모두 이 몸을 입은 이곳에서 새롭게 배우려고 겪은 일뿐입니다. 둘째, 아프거나 안 아픈 일은 모두 마음과 생각 탓입니다. 아픔하고 안 아픔 사이에는 아무것이 없어요. 가난하고 가멸(부자) 사이에도 아무것이 없답니다. 가시아버지가 말도 못 하시고 죽음을 코앞에 둔 이 자리에서 두 손에 1조 원이라는 돈을 누가 쥐어 준들, 가시아버지는 가면 살림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텅 빈 사람이 가난합니다. 마음을 사랑으로 그린 사람은 늘 가멸찬 하루입니다. 셋째, 아쉬운 일도 아쉬워할 일도 없어요. 가시아버지가 이루고 싶던 꿈을 펼치지 못해 안타깝다고 땅을 칠 일도 없어요. 몸을 내려놓는 일이란 죽음이 아닌 새길입니다. 우리는 몸뚱이로 살지 않아요. 우리는 몸뚱이로 이 삶을 겪으면서 배울 뿐입니다. 우리는 넋으로만 살아갑니다. 우리 넋은 몸하고 마음으로 두 갈래 길을 걸어가려고 이곳에 태어나는데, 몸으로 맞아들인 삶을 새록새록 새겨서 마음에 담는답니다.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라고 가르지 마셔요. 바로 오늘 이곳에서 가시아버지가 살아온 모든 나날은 오롯이 ‘삶’이었고 ‘살림’이었기에 가시아버지 나름대로 깨달을 ‘사랑’으로 나아가려고 걸어온 길입니다. 아파서 너무 괴로우셨으면, 이 몸을 내려놓고서 새롭게 입을 몸뚱이인 삶에서는, 그러니까 다음삶(내생)에서는 아프지 않을 튼튼한 몸을 그리셔요. 가난한 집안에서 맏이로 태어나서 동생을 먹여살리고 가르치느라 뼈빠지게 힘드셨다면, 가멸찬 집안에서 느긋이 태어나서 가시아버지가 이루고 싶은 꿈을 넉넉히 이루는 새살림을 꿈으로 그리셔요. 이제는 새빛으로 나아갈 새몸을 그리실 때입니다.” 먹어야 배부르지 않다. 안 먹기에 배고프지 않다. 나는 아무리 짊어져도 짐이라 여기지 않고 그저 빙그레 웃는다. 땀이 비오듯 쏟아지면 “아, 땀이 이렇구나.” 하고 느낀다. 두 아이 똥오줌기저귀를 날마다 숱하게 손빨래하면서 “우리 어머니도, 우리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도, 먼먼 옛날부터 이렇게 손빛이 눈부신 살림꽃이셨구나.” 하고 깨달았다. 나는 돌봄터(병원)에 들어갈 수 없기에 마음으로 가시아버지한테 마지막말을 띄운다. “오늘까지 걸어오신 몸은 포근히 내려놓으시기를 바라요. 활짝 웃으며 춤출 수 있는 꽃빛으로 피어날 씨앗 한 톨로 새롭게 나아가 보셔요. 오늘하고 어제하고 모레는 늘 하나입니다. 언제나 하나이기에 하늘빛이고 함께예요. 사랑합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