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2022.6.25.

아무튼, 내멋대로 15 김치 달걀



  처음으로 마주하는 이웃님이 “밥으로 뭐 좋아하셔요?” 하고 물으시면 “안 먹기를 가장 반깁니다.” 하고 말씀한다. ‘안 먹기’를 늘 첫째로 꼽는데, 내가 ‘안 먹기’를 누리도록 헤아린 이웃님을 여태 두 사람 만났다. “그래도 뭘 좀 먹어야 하지 않아요? 안 먹고 어떻게 살아요?” 하는 말에 “그러면 안 매우면 됩니다. 그리고 개나 미꾸라지나 선지는 빼고요.” 하고 보탠다. “따로 좋아하는 밥은 없어요?” 하고 더 물으시면 “국수나 라면이나 짜장국수도 되고, 빵 한 조각이어도 됩니다.”라 하는데, 이렇게 밝히는 뜻을 헤아린 이웃은 아직 못 만났다. 나는 김치를 못 받아들이는 몸이다. 찬국수(냉면)도 못 받아들이고, 크림을 듬뿍 넣은 달콤이(케익)도 못 받아들인다. 요구르트·요거트를 찻숟가락만큼 맛은 볼 수 있되 썩 가까이하고픈 마음이 없다. 여기에 김조차 꺼린다. 어린날(1975∼1987)을 보내는 동안 무엇보다 ‘밥먹기’가 괴로웠다. 동무네에 가서 놀다가 동무네 어머니가 “같이 밥 먹자.” 하고 부르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내 몸이 못 받아들이는 먹을거리가 수두룩하기에 우리 집에서뿐 아니라 동무네 집에서도 언제나 ‘밥때’가 날마다 끔찍했고 골이 아팠다. 숱한 사람들은 ‘먹는 재미’로 산다고 말하더라. 그러나 ‘안 먹는 기쁨’으로 살고픈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안 먹는 기쁨’으로 살고픈 사람이 고작 1/1,000,000,000이라고 하더라도 틀림없이 있다. 더구나 나는 김치를 진저리나도록 못 받아들이는 터라, 어느 집에나 있는 김치를 볼 적에는 눈앞이 어질어질하다. 우리 아버지는 ‘김치 못 먹는 아들’을 밥자리에서 늘 한숨에 짜증으로 나무랐고, 억지로 김치를 입에 욱여넣으면 뱃속이 뒤집혀 바로 게우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나, 그야말로 악을 쓰며 참고 또 참아 꿀꺽 겨우 삼키면 어느새 어머니 아버지 언니는 밥그릇을 다 비웠다. 나 혼자 김치 한 조각하고 오래오래 씨름했다. 우리는 왜 굳이 ‘덩이진 밥’을 먹어야 할까? 굶으며 산다고 죽을까? 고기밥(육식)도 당기지 않지만 풀밥(채식)조차 당기지 않는다. 고기밥만 목숨이 아니다. 풀밥도 목숨이다. 돼지·소·닭만 목숨이 아니다. 시금치·배추·당근·무도 목숨이다. 사람들은 다른 목숨을 밥으로 삼아 제 목숨을 잇는다고 하는데, 바람을 마시고 물을 머금기만 하면서도 얼마든지 즐겁게 삶을 누릴 만하다고 느낀다. 우리가 바람밥·물밥을 잊은 채 고기밥·풀밥을 허겁지겁 욱여넣으려 하면서 자꾸 싸움이 불거지지 않나? 먼먼 옛날사람이 들살림(수렵채집)을 할 적에 ‘잘 먹지도 못 하고 힘들게 살았으리라 지레 어림’하는 이들(역사학자·문화인류학자)이 많은데, 난 그렇게 바라보지 않는다. 먼먼 옛날사람은 조금만 먹어도 넉넉한 살림이었으리라 느끼고, 굳이 안 먹고 바람이랑 물만 누려도 튼튼한 몸이었으리라 느낀다. 내가 “김치를 못 받아들이는 몸”이라고 말할 적에 알아듣는 사람은 여태 둘이었는데, 두 사람을 빼고는 “어떻게 한국사람이 김치를 못 먹어?” 하는 핀잔이나 비웃음이나 놀람이었다. 난 “왜 한국사람이라고 해서 다 김치를 먹어야 하지요? 우리 겨레가 김치를 먹은 지 고작 오백 해(500년)가 안 된 줄 모르시나요? 고춧가루를 넣은 김치라면 고작 백 해조차 안 되는데 모르나요?” 하고 대꾸한다. 돌이켜보니 외할머니도 나를 헤아려 주셨구나 싶다. 김치를 못 먹기에 밥자리에서 힘든 나를 알아챈 외할머니는 외사촌 누나한테 “야, 얼른 가서 우리(닭우리)에서 달걀 하나 가온나.” 하고 시켰다. 다들 눈이 동그래졌다. 그무렵 달걀은 웃어른이 이따금 누리는 값진 먹을거리였으니까. “내 몫으로 줄 테니 암말 말어.” 하시며 내 밥에 손수 날달걀을 톡 까서 부어 주셨다. 나는 날달걀도 못 먹기는 했으나 김치보다는 나았다. 차마 외할머니 앞에서 ‘날달걀도 못 먹는 티’를 낼 수는 없더라. 그 뒤 나는 밥때에 이르면 일부러 밖에서 뛰놀며 멀리 달아났다. “쟤가 노느라 바빠서 밥 먹을 때도 모르는가 보다.” 하는 소리가 나오도록.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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