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2022.5.27.
아무튼, 내멋대로 5 스승이 없다
우리 어머니는 작은아이한테 글을 가르치지 않았다. 우리 언니는 어린이집(유치원)을 다녔다. 언니는 ‘아들 드문 집안 맏이’라 ‘없는 돈을 어떻게든 빌리고 얻어’서, 인천에서 가장 좋다는 어린이집에 억지로 넣었다고 들었다. 언니한테 목돈을 쓰자니 작은아이한테 쓸 돈은 없으나, 일곱 살에 어린이집에 안 넣을 수 없었다지. 나도 언니처럼 어딘가(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언니가 날마다 가는) 가고 싶다고 어머니를 조른 듯싶다. 어머니는 ‘유치원 구실도 하는 마을 미술학원’에 나를 넣어 주셨고, 나는 그곳에서 ‘수업·공부’가 아닌 ‘놀기’를 하며 한 해를 참 잘 보냈다. 다만, 글은 몰랐는데 “어머니, 나만 글을 모르는데요, 글 좀 가르쳐 주세요.” “글? 국민학교 가면 다 배우는데 뭘 벌써 배워? 어머니 바쁜 줄 알지? 집안일이 얼마나 많냐. 그냥 국민학교 가서 배우면 안 되겠니?” 1982년에 들어간 국민학교에서 비로소 ‘한글’이란 이름을 듣고, 며칠이 안 되어 떼었다. 글씨도 셈도 매우 재미났다. 다만, 툭하면 때리고 차고 괴롭히고 물동이를 들라 시키고, 또래 앞에서 창피하게 닦달하는 어른(교사)은 너무 싫고 무서웠다. 열아홉 살에 푸른배움터를 마칠 때까지 나로서는 ‘스승’이 없다고 느꼈다. 그래도 하나를 꼽자면, 1992년 8월 28일부터 드나든 인천 배다리책거리에 있는 헌책집이다. 헌책집 할머니 할아버지 아줌마 아저씨는 내가 한나절(네 시간)은 가볍게 틀어앉아서 말없이 책읽기를 해도 너그러이 봐줄 뿐 아니라, 책값을 깎아 주거나 이따금 거저로 주면서 “책을 좋아하니 그냥 주지. 대견하네.” 하셨다. 배움옷(교복) 차림으로 뻔질나게 와서 주머니를 탈탈 털어 책값을 치렀다. “책값 많이 써서 어쩌나?” “뭘요. 걸어가면 돼요.” “집이 어딘데.” “○○동이에요.” “거기까지? 멀잖아?” “뭐, 오늘 산 책을 읽으면서 두어 시간 걸으면 돼요.” 국·중·고등학교보다 나으리라 여겨 들어간 열린배움터(대학교)도 매한가지라, 드디어 열린배움터는 그만두고 보니, 참말로 나로서는 나를 이끈 ‘사람스승’은 딱히 없다. 언제나 ‘책집지기’ 어른만 나한테 길잡이요 스승일 뿐이다. 스물다섯 살 무렵에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을 적에도, 스물아홉 살에 ‘떠난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하는 일을 맡을 적에도, 아주 마땅히 나한테는 사람스승이란 늘 책집지기 아재 아지매 할매 할배뿐이었다. 곁님을 만나 2008년에 큰아이를 낳고서, 2010년 가을에 인천을 떠나 시골로 삶터를 옮기면서, 바야흐로 스승으로 꼽을 숨결을 찾았다. 첫째, 곁님이 스승이다. 둘째, 아이들이 스승이다. 셋째, 숲이 스승이다. 곁님하고 두 아이랑 시골에서 살아가며 숲을 품는 길을 걷던 어느 날, 내가 나를 가리키는 글이름(필명)을 ‘숲노래’로 새롭게 지을 무렵, 나한테 넷째로 스승이 있다면 바로 ‘나’로구나 싶더라. 내가 나를 스스로 스승으로 삼을 줄 알기에 곁님을 스승으로 여기고, 아이들을 스승으로 두며, 숲을 스승으로 품는 살림을 걸어왔다고 느낀다. “최종규 씨는 스승이 없다고요? 당신은 혼잘멋(혼자 잘난 멋)인가요?” “저는 늘 곁님하고 아이들하고 숲한테서 배웁니다만, 그래서 남들이 물으면 이 세 님이 스승이라고 말합니다만, 곰곰이 보면 누구한테나 스승이란 있을 수 없어요. 이 말을 다들 못 알아들으시는 듯해서 그냥 ‘저한테는 제가 참스승입니다’ 하고 말하는데요, 스승이란, 가르치거나 이끄는 사람이 아닙니다. 스승이란, 스스로 슬기롭게 살아가는 숲빛을 품으며 스스럼없이 드러낼 뿐인 이슬인 사람입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 스스로 스승일 뿐’이고, 남을 스승으로 삼거나 여긴다고 하면 ‘우상숭배’일 뿐 아니라, 스스로 허깨비나 허수아비가 되어 참나(진정한 자아)를 잊고서 바보로 뒹구는 쳇바퀴에 스스로 갇힌 채, 우두머리(권력자)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면서 사랑을 나란히 잃는, 슬프면서 슬픈 줄조차 못 느끼는 부스러기로 목숨을 잇는다고 느껴요. 누구한테나 스승은 따로 없이,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가르치고 스스로 살림하고 사랑하면서 빛날 뿐입니다.” “……. 허허, 도인 납셨네.” “네, 모든 사람은 누구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