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2022.5.23.

아무튼, 내멋대로 2 눈 깔어



  숲노래 씨는 2001년부터 출판사 일꾼(편집장)으로서 ‘국어사전’을 엮는 일을 맡았고, 이 일은 스무 해가 지난 2022년에도 하지만, 1995년에는 그저 앳된 스무 살일 뿐이었다. 인천에서 나고자랐되, 어머니 옛집인 충남 당진에 곧잘 갈 적에 “아, 내 뿌리는 이곳(충청남도)에 있구나” 하고 생각했고, 어머니 말씀으로는 할아버지가 황해도에서 나고자랐다고 해서 “난 충청도하고 황해도가 섞였구나” 하고 생각했더니 “그런데 너희 할아버지도, 또 너희 아버지하고 어머니도 인천에서 살림을 꾸렸어.” 하셔서 “그럼 난 충청도에 황해도에 인천에 섞인 몸이네.” 하고 여겼다. 여기에 서울 대치동 은마아파트에 일찌감치 깃든 작은아버지가 있어 “너무 낯설고 깍쟁이다운 서울말씨”를 들으며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동생들이 서울 대치동에서 사니, 내 뿌리 가운데 어느 만큼은 서울에도 있으려나?” 하고 여겼다. 이러던 스무 살에 강원도 양구 멧골짝으로 끌려갔다. 싸울아비(군인)가 되었다. 난 틀림없이 남녘 싸울아비이지만, 길그림(지도)을 보면 우리 싸움터(군대)는 북녘에 있다고 할 만했다. 이등병 때 하도 아리송해 어느 날 ‘얻어맞아도 좋다’고 생각하며 윗내기(고참)한테 여쭈었더니, 이 물음에는 안 때리고 “응, 너 이제 알았니? 여기는 알고 보면 남한 아닌 북한이야.” 하더라. 움찔했지만 백예순여섯 사람(우리 중대원인 육군 보병)이 여기에 있으니 “다 같은 삶”이리라 여겼다. 그런데 어릴 적에도 늘 겪었지만, 싸울아비(군인)로 살며 날마다 들은 말은 “야 이 ××야, 눈 깔어!”이다. 날마다 얻어맞고 밟히고 막말을 듣다 보니, “야 이 ××야, 눈 깔어!”란 말 다음에 저절로 고개를 숙일 뿐 아니라, 눈을 밑으로 본다. 싸움터에서 내 눈길은 윗내기(고참) 가슴팍을 보아야 했다. 턱 즈음을 보려고 하다가는 아구창이 날아간다. 얼마나 얼얼하던지. 윗내기가 하는 말을 들을 적에는 늘 가슴팍을 쳐다보며 고개를 숙여야 했는데, 스무 살 싸울아비이던 무렵에는 이럭저럭 날마다 얻어터지면서 버티었지만, 나중에 삶터(사회)로 돌아오고서 한 해 두 해 열 해 스무 해 지나고 보니 “오래 길든 이 눈길”이 자칫 응큼질(성추행)이 될 수 있겠다고 느꼈다. “야 이 ××야, 눈 깔어!” 하는 말을 스물여섯 달 동안 날마다 숱하게 듣고 살다가 바깥으로 나오고서, 누구를 만나건 으레 저절로 “고개를 살짝 숙이거나 눈을 까는 버릇”이 나오는데, 내가 돌이(남자)랑 마주하면 걱정없지만, 순이(여자)랑 마주하면, 아차차 “눈을 까는 높이”는 그만 순이 가슴팍을 쳐다보는 눈높이가 되더라.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다 있나. 1997년 12월 31일에 드디어 싸움터(군대)를 마쳤으니까 2022년이면 스물 몇 해가 지난 일인데, 어쩜 아직 그때 그 몸짓을 다 털지 못했을까? 아니 그때 날마다 숱하게 얻어터지고 막말을 들으며 살던 버릇을 미처 씻어내지 못한 터라, 그만 저절로 고개를 숙이다가 “내가 앞사람하고 마주하는 눈높이가 그만 어처구니없는 곳을 보는 눈길”로 꽤 굳었다고 느꼈다. 곁님이 그러더라. “여보, 당신은 왜 나하고 얘기를 할 적에 자꾸 고개를 숙여? 왜 눈을 안 마주쳐?” 나도 잘 몰랐다. 이제서야 깨닫는다. 열아홉 살 무렵까지는 늘 고개를 들고서 마주보았고, 부끄러울 적에는 살며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을 뿐, 밑으로 깐 적은 없다. 그런데 싸움터에서 날마다 끝없이 얻어맞고 밟히다 보니 어느새 고개를 옆이 아닌 밑으로 까는 버릇이 배었더라. 오늘(2022.5.23.) 서울에 바깥일이 있어서 ‘이야기(좌담)’를 하는 자리에 왔는데, 함께 이야기하는 분이 “최종규 씨는 욕 안 하셔요?” 하고 물을 적에 살짝 눈앞에 캄캄했다. 난 싸움터(군대)에서 들은 욕, 그리고 상병 8호봉부터 병장 6호봉 사이에서 둘레 막말질에 물들어 쓴 욕이 내 삶에서 쓴 모든 욕인걸. ‘막말(욕)’이란, 생각만 해도 끔찍한데, 그때 일이 갑자기 떠올라 저절로 “싸움터에서 고개 숙이던 버릇”이 나왔고, 스스로 더더욱 끔찍했다. 그러나 이 일을 낱낱이 되새기면서 내 아픈 발자국을 더듬었으니, 이제부터는 “눈을 밑으로 까는 버릇”은 털어내려고 생각한다. 난 막말(욕)을 쓰고 싶지도 않고, 이웃이며 동무를 힘으로 억누를 뜻도 없고, 언제나 풀꽃나무랑 어깨동무하고 싶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참말로 군대란

사내가 갈 곳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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