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 사슬은 헌책방까지 짓밟는다
 - 나쁜법은 ‘나쁜’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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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어사전에서 ‘국가보안법’이라는 말을 찾아봅니다. 풀이를 읽으니,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 활동을 규제하도록 제정한 법률.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하기 위하여 행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한 나라 안전을 흔들거리게 한다는 ‘나라를 거스르는 짓’이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 나라 사람들을 안전하게 살아가게 하며 자유를 지키려고 하는 일이란 또 무엇일까요. 벌써 다섯 해가 지난 일입니다만, 미선이와 효순이가 미군 장갑차에 치여서 개죽음으로 사라져 버렸을 때 ‘국가보안법’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가녀린 어린 목숨이 꽃을 피우지 못했는데. 지금도 파주며 철원이며 군부대가 득시글거리는 시골마을 길가에서는, 미군 장갑차와 탱크가 군사훈련이라면서 논둑을 무너뜨리고 ‘말리는 곡식’을 죄 짓이겨 놓아도 ‘못 봤다’는 말 한 마디로 둘러대고 아무런 피해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적으면 수십 억, 으레 수백 억, 때때로 수천 억을 빼돌리는 어마어마한 ‘경제사범’들이 곧잘 언론매체에 이름을 올립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제사범이 얼마나 엄청난 돈을 빼돌렸어도 구속이 되어 심문을 받고 그동안 빼돌린 돈을 뱉어내는 일이란 볼 수 없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두 사람 또한 아직까지 추징금을 안 내고 있으나 국가보안법은 이 두 사람을 붙잡아 가두지 않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나라살림을 엉터리로 꾸려 간다고 욕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노무현 대통령을 헐뜯는 사람이 ‘나라를 거스르는’ 셈인가요, 아니면 노무현 대통령이야말로 ‘나라를 거스르고’ 있으니 국가보안법에 따라 벌을 주어야 하는 셈인가요.

 자전거를 탈 때든 걸어서 다닐 때든 늘 겪는 일입니다만, 건널목 푸른불이 바뀌면 사람들이 다 건널 때까지 잘 기다려 줄 뿐 아니라, 걸음이 느린 아이나 어르신이 빨간불에도 미처 못 지나갔어도 경적을 울리지 않고 기다리면서 뒷차가 빵빵대는 소리를 고이 받아 주는 운전자가 퍽 많습니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푸른불이 되어 사람들이 절반 가까이 건너고 있는’ 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을 치건 말건 밀어붙이는 운전자도 꽤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운전자한테 손가락질을 하며 “야 임마! 그 따위로 운전하면 돼! 사람 죽이려고 해!” 하고 큰소리를 치면, 차 유리창을 내리며 “니가 뭔데 지랄이야?” 하면서 되받는 운전자를 쏠쏠히 볼 수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길을 달릴 때면 95/100쯤 되는 운전자는 아무 말 없이 자전거 옆으로 멀찍이 떨어져서 안전하게 지나가 주지만, 5/100쯤 되는 운전자는 갑자기 밀어붙이거나(진짜로 칠 때도 있습니다) 골목길로 꺾어들거나 길가에 차를 댄다며 홱 앞으로 끼어들거나 귀따갑게 빵빵거리며 비키라고 합니다. 자전거를 괴롭히는 다섯 사람 말고, 자전거를 지켜주는 아흔다섯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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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안법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 때 처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가 해방과 함께 사라졌으나, 1950년대 끝무렵에 이승만 대통령이 다시 끄집어내어 날치기로 국회에서 통과시켰습니다. 독재정권 몸부림이 하늘을 찌르던 그때, 자기를 반대하는 세력을 ‘합법이라는 올가미’로 씌우고자 만든 국가보안법이었던 만큼, 그때 야당을 비롯하여 모든 언론매체가 들고 일어나서 반대를 했지만, 이 법을 없애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맞이한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군사쿠테타. 1960년 4월 19일 학생혁명을 일으킨 우리들이지만, 젊은 피로 얻어낸 민주와 평화를 ‘장면 민주당 정권’은 제 이익을 챙기는 데에만 골똘한 나머지 국가보안법이며 다른 나쁜법이며 쓰레기통에 던져넣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장면 민주당 정권은, 자기 정권이 능력없고 썩어문드러지는 꼴을 비판하며 집회하는 사람들을, 바로 이 ‘국가보안법’ 올가미로 묶어서 입을 막으려고 휘둘렀는지 몰라요. 이런 휘두름은 여태까지도 그치지 않고요. 이렇게 하여 2007년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우리들 생각과 움직임을 꽁꽁 붙들어 맨 국가보안법입니다. 이 법을 처음 만든 일본 제국주의자, 이 법을 살려낸 이승만 독재정권, 이 법을 마음껏 휘두르며 또다른 독재정권을 이어간 박정희 정부, 그 뒤로 이어진 군사독재자인 전두환과 노태우, 이들을 이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세 대통령, 모두들 국가보안법이 권력자한테 얼마나 훌륭한(?) 무기인 줄 잘 깨닫고 있습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고, 귀에 걸면 귀고리가 되는 국가보안법이거든요.

 《우승규-나절로 만필》(탐구당,1978)이라는 책을 보면, 〈동아일보〉에 오랫동안 주필로 글을 쓴 우승규 님이 1959년인가 1960년에 〈‘보안법’과 언론인의 분기〉라는 이름으로 실은 글이 있습니다. 조금 옮겨 보겠습니다.


.. ‘새 국가보안법안’―자유당 정권은 이 법을 고쳐 만들려고 바둥바둥 애를 썼다. 자초의 목적은 딴 데 있었다. 그들이 표방한 것은 ­‘간첩죄의 개념’을 보다 명백히 정립하겠다는 것이었으나 천만의 말이다. 그 속엔 그보다도 ‘언론규제’를 한층 철저하게 강화하겠다는 엉큼한 속셈이 숨어서였다. 북괴의 도발로 시국이 긴박한 준전시 상태도 아니었건만 이렇듯 흉물스런 낌새를 알아챈 신문ㆍ방송ㆍ잡지 등 매스컴과 야당에선 연합전선을 펴고 반대하는 횃불을 들었다. ‘신문편집인협회’가 앞장서서 들고 일어났다. “민주국가로서의 가장 큰 악법”이라고 규탄했다. 각 신문들의 공동성명에서 적극 배격한다는 의사를 명백히 했다. 그 성명에서 “6ㆍ25 뒤 언론계가 반공방첩을 위해 피눈물나는 동일보조의 투쟁공적은 추호도 계산에 넣지 않고 그럴 수가 있느냐”고 노염에 가득찬 반박을 했다. 그것은 어느 날 자유당의 어떤 간부가 솔직하게 “국가보안법의 개정 의도는 뭣보다도 방종한 언론을 견제하고 단속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고 실토한 때부터 더욱 흥분들 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더라도 자유당의 ‘새 군가보안법안’이란, 언론자유 봉쇄의 다섯 번째 시도였다. 앞섯번에도 수차나 말했듯이 ‘광무신문법’의 폐기 뒤를 이어 ‘출판물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만들려다가 움찔, 둘쨋번엔 ‘새 출판물법안’이 그러했고, 셋째번엔 ‘국정보호임시조치법안’이 또 그러했는가 하면, 넷째번엔 ‘협상선거법’ 중의 언론조항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번번 고개를 들다간 언론계로부터 되게 얻어맞고 수그러졌던 ‘고물단지’를 거듭 들고 나섰으니, 언론인들의 지탄을 안 받을 수 없었다 …… 그러나 이어서, “그렇던 자유당이 오늘엔 여론을 전혀 깔아뭉개고 ‘방공 철저’에 이름을 빌어 나라의 일년지계인 예산안의 심의마저 월년을 시키면서까지 ‘국가보안법안’을 기어이 통과시키겠다고 공언한 것은 무슨 소리냐”고 비난했다.
 신문들의 논조가 뜻밖으로 강경해지자 자유당은 어거지를 쓰면서 신문에 맞섰다. 매스컴에선 “언론억압 조항”만을 반대했건만, 마치 그 법 전체를 무시하는 것처럼 덮어씌우려 했다. 즉 “동법의 개정이나 강화를 방해하는 자는 결과적으로 그들(공산도배)의 간악한 계략과 술책에 빠지는 것”이라고, 우리 언론인들을 ‘간첩동조자’처럼 몰아쳤다. 그야말로 ‘적반하장’의 젖내나는 억설이 아니던가 ..  〈550∼551쪽〉



 이 책에서 우승규 님은 “문제는 ‘인심을 혹란케 하여 적을 이롭게’라는 점에 있었다. 그것은 귀걸이 코걸이 식으로 언론인들의 숨통을 틀어막자는 것이었다. 중앙과 호흡을 같이하려는 지방 언론동지들의 분기는 당연했다. 특히 시골서 고립무원한 그들에게 만일 ‘언론규제’의 그 조항이 국회를 통과한다면 가뜩이나 푸대접받는 그들은 손과 발을 결박당하게 되므로 안 그럴 수 없는 절박한 문제점이었다. 다른 한편, 지방 각처로부터 “동법의 빠른 통과를 촉진토록 진정한다”는 연판장이 각 신문사로도 날아들었다. 이것은 묻지 않아도 부산에서 정치파동 때에 있었던 ‘우의마의’ 따위의 조작된 민의다. 나는 두 번째로 〈인권옹호가 구두선에 그치지 말라〉는 사설로 언론조항의 삭제를 극력 주장했다.”고 덧붙입니다. 말 그대로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국가보안법입니다. 그리하여, 헌책방 일꾼을 붙잡아 가두려는 공안 경찰들은 ‘자기 스스로 읽어 보지도 않은 책(그래서 줄거리가 어떤 줄 모르면서 딱지만 붙어제낍니다. 공안 경찰이 불온이념도서라고 한 책에는 《노자와 21세기》조차 들어 있으니까요)’에 빨간딱지를 붙이며 ‘불온 이념도서’라고 못박습니다. ‘불온 이념도서’란 “나쁜 생각을 품고 나라를 뒤엎으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독재정권을 뒤엎던 젊은이들이 읽던 책, 썩은 나라를 뒤엎으려고 한 그분들이 읽던 책도 ‘나쁜 책’인가요. 나라(일제 식민지)를 뒤엎으려고 했던 분들 책이기 때문에 안중근 의사가 쓴 글을 담은 책과 장지연 님이 쓴 글을 담은 책마저도 ‘불온 이념도서’ 목록으로 집어넣는가요?

 우리 나라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그래서 나라 안팎 경제학과 대학교수들은 ‘자본주의 사회를 파헤친 보고서나 학습자료나 연구결과서’를 책으로 묶어냅니다. 공안 경찰들은 ‘마르크스와 레닌이 썼다는 자본론’을 나쁜 책으로 삼는데, 이 두 사람이 쓴 책이 들어간 ‘자본’하고는 아주 다른 ‘자본’을 이야기하는 책까지 ‘불온 이념도서’ 목록에 넣은 모습을 보노라면, 그저 겉핥기로 대충 수사를 하며 공무원 실적을 올리려는 꾐수로만 느껴집니다. 아니, 겉핥기 꾐수 수사만이 아니라, ‘민중을 지키는 지팡이’로 일할 경찰이 아닌 ‘민중을 때려잡아 자기들 쇠밥그릇만 지키면 된다는 못된 몽둥이’로 백성을 짓밟고 올라탄 나쁜 놈들입니다.

 헌책방 일꾼은 책을 팔아 장사를 할 뿐입니다. 공안 경찰이 말하는 ‘불온 사상 유포죄’라면, ‘공안 경찰 당신들이 빼앗아 간 책으로 대학교 경제학과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들을 샅샅이 찾아내어 붙잡아 갈 일이 아닐까요. 이 일이 먼저가 아닐까요. 그보다는 이런 책을 써내는 사람들과 펴내는 사람을 붙잡아야 하지 않을까요(그런데 이렇게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나라는 ‘자유민주주의’ 나라이니까요. 그 어떤 사상과 철학과 믿음까지도 자유롭게 펼치고 나눌 수 있어야 하는 나라니까요. 이 글을 읽는 당신께서 불교를 믿는다고 해서 기독교 믿는 이는 다 죽어야 합니까? 이 글을 읽는 당신께서 기독교를 믿는다고 해서 이슬람교 믿는 사람은 다 없어져야 합니까?).

 헌책방에 들어와서 팔리는 사회과학책은 몇 권 안 됩니다. 2003년 여름부터 장사를 한 〈가자헌책방〉은 네 해가 조금 못 되는 동안 16000권이 넘는 책을 팔았고, 이 가운데 500권이 채 안 되는 책이 ‘불온 이념도서’ 딱지를 받았습니다. 딱지를 받을 만하냐 아니냐를 떠나서, 이 책을 ‘불온 이념도서’라고 쳐 봅시다. 그러면 1만6천 권 가운데 500권이면 몇 %입니까. 5/160이면 %로 얼마입니까?

 %로 치면 거의 안 팔렸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 책, 실제 새책으로도 첫판 3000권은커녕 1000권도 잘 안 팔리는 이 책들입니다. 그동안 헌책방에서 이런 책이 팔렸다고 해 보아야 몇 권이나 팔렸을까요. 헌책방 일꾼들도 ‘사회과학 책들은 요새 안 팔리기 때문에, 중간상인이 팔러 와도 잘 안 사고 그냥 버린다’고 이야기합니다. 어쩌다 사 놓고 책꽂이에 갖추어 놓아도 오래도록 먼지만 먹고 있기 때문에 틈틈이 갈무리해서 폐휴지로 버립니다. 팔리는 부수나 가짓수로 따진다면, 〈교보문고〉와 〈영풍문고〉를 따를 수 없겠지요. 그런데 왜 헌책방 일꾼이 붙잡히고 구속이 되고 구속적부심을 받아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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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안법은 이름만 좋은(?) 법이라고 느낍니다. ‘나라를 안전하게 지키자’는 뜻으로 만들었다고 하니, 이름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다면 이 법으로 지키겠다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나라는 어떻게 있어야 ‘안전하게 지켜지’는가요.

 저는 이달 6월 1일에 인천 배다리 헌책방골목에 사진책 도서관을 열었습니다. 개인 도서관입니다. 한 자리를 마련해 책꽂이를 착착 들여놓고 책도 갈래에 따라 나누어 꽂아 놓는 동안 ‘도서관등록’을 신나게 알아보았습니다. 인터넷으로도 뒤지고 구청과 문화관광부 서식과 알림글도 꼼꼼이 챙겨 읽었습니다. 그리하여 얻은 것은 ‘대학교 문헌정보학과를 나와 사서자격증을 따고, 열 사람이 넘는 도서관위원회를 꾸미고 도서관 크기와 시설을 어떠어떠하게 갖추고 이밖에도 여러 가지 조건을 채워서 허가를 받지 않는다’면 ‘도서관 등록’이 안 될 뿐 아니라, ‘도서관이라는 이름’조차 쓸 수 없도록 되어 있는 〈도서관 및 독서진흥법〉 조항들. 이름은 ‘도서관과 독서를 진흥한다는 법’입니다. 그러나 실제 알맹이를 들여다보면, 2006년 여름까지 도서관으로 등록한 곳들이 나라에서 뒷배(돈 얼마쯤)를 독차지하고자, 그 뒤로 새로 문을 열 도서관을 막아 주는 장치, 이른바 쇠밥그릇이 〈도서관 및 독서진흥법〉이었습니다. 참 웃기는구나 싶고, 저는 나라나 지역정부에서 제 도서관에 어떤 뒷배를 안 해 주어도 상관없기 때문에 한 푼 도움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 책과 힘과 돈으로 여는 사진책 도서관은 ‘도서관’으로 등록할 수도 없지만 ‘도서관’ 이름조차 쓰면 안 되도록 못박혀 있습니다. 그래, 하는 수 없이 등록은 ‘출판사 등록’을 했습니다.

 〈자전거이용 활성화에 관한 법률〉이 있습니다. 이 법을 보면, 15조 1항에 “자전거의 운전자는 도로교통에 관한 법령을 준수하여 자동차의 통행에 방해가 되거나 보행자에게 위해를 주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라는 말이 적혀 있습니다. 2항에는 “자전거의 운전자는 자전거도로를 통행하여야 한다. 다만, 자전거도로가 설치되지 아니한 도로에서는 다른 법령에 통행방법이 따로 규정되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보행자에 주의하면서 도로(차도와 보도가 구분된 도로에서는 차도를 말한다)의 우측가장자리 부분으로 통행하여야 한다”라고 적혀 있고, 3항에는 “자전거운전자가 자전거에 탑승한 채로 도로를 횡단하고자 할 때에는 자전거횡단도를 이용하여야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자전거이용 활성화’라고 하지만, 자전거는 ‘자동차 통행에 방해되는 물건’으로 여겨집니다. 정작 ‘활성화’를 할 어떤 조항도 들어 있지 않은 법령이 〈자전거이용 활성화에 관한 법률〉입니다.

 자전거는 자전거길로 다니라고 하지만, 지금 우리 나라 ‘정식 자전거길’ 가운데 98% 넘는 길은 ‘일반 거님길을 반으로 뚝 갈라서 돌을 다른 빛깔로 깔고 페인트 죽 그은 길’입니다. 지금도 중앙정부와 지역정부에서 ‘자전거길을 만든다’면서 수십 수백 수천억 원까지 들여서 짓는다는 자전거길은 ‘사람들 다니는 거님길’을 반으로 뚝 자르는 것으로 잡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전거를 타고는 건널목도 건널 수 없지요. 찻길을 달리면서도 네거리 신호에 따라 달릴 수도 없지요. 건널목이나 네거리에 ‘자전거횡단도’가 페인트로 그려진 길은 눈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을 만큼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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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방을 괴롭히는 여러 가지 가운데 지금도 아주 사라지지는 않은 일로 ‘헌책방 일꾼을 장물아비로 보는 경찰들 눈길’이 있습니다. 열 해 스무 해 넘게 헌책방 살림을 꾸려 온 분들은 몸으로 익혀서 ‘훔쳐 와서 팔려는 책’을 가려보는 눈이 있다고는 하지만, ‘모든 훔친 책’을 솎아내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때때로 ‘훔쳐 온 책을 멋모르고 사들였다’가 ‘책을 도둑맞았다는 임자가 신고해서 붙들려 가는’ 일이 더러 있습니다.

 어이없이 장물아비로 몰려서 더러더러 경찰서에 끌려가서 하루 동안 장사를 못하는 일, 그리고 몰래 사전이며 비싼 책을 훔쳐가는 책도둑한테 시달리는 일, 여기에 헌책방 일꾼은 ‘재주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능력도 없는 밑바닥 인생이나 하는 모자란 일감’으로 여기는 사회 눈길, 거기에 국가보안법 위반 딱지까지.

 이렇게 해 놓고 헌책방 일꾼보고 어떻게 일하라는 소리일까요. 헌책방은 이 땅 이 나라에서 죄다 사라져 버려야 속이 시원합니까? (4340.6.19.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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