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빛 2021.11.12.

헌책집 언저리 :‘책’이라는 글씨



  두 다리로 의젓하게 ‘책’이라는 글씨를 찾아나서며 살았습니다. 어느 마을 어느 골목쯤에 책집이 있나 그리면서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걸었습니다. “못 보고 지나쳤는지 몰라” 하고 생각하면서 모든 골목을 다 걸으려 했습니다. “어떻게 골목을 그리 환히 꿰슈? 젊은 양반이 택시기사보다 길을 더 잘 아네? 택시기사를 해도 되겠구만.” 하는 말을 들을 적에는 “저는 운전면허를 안 땄어요. 걸어다니려고요. 책을 읽으려면 손잡이를 쥘 수 없고, 또 그때그때 떠오르는 글을 쓰려면 더더구나 손잡이를 못 잡아요.” 하고 대꾸했습니다. 눈을 밝혀 ‘책’이라는 글씨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알림판을 내걸지 않은 헌책집도 많기에, 더욱 눈을 밝혀 ‘책’이라는 글씨를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먼먼 곳에서 “어! 저기에 ‘책’이라는 글씨가 있구나!” 하고 찾아내면 몇 시간째 걷느라 퉁퉁 부은 다리에 새힘이 솟습니다. 마을에 깃든 헌책집은 하나같이 작았습니다. “이 작은 헌책집을 찾으려고 몇 시간을 이 골목 저 골목 헤맨 사람은 처음 봤네?” 하고 너털웃음을 짓는 헌책집지기님한테 “이곳을 오늘까지 지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여쭈었습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두어 시간은 가볍게 책을 읽고, 서너 시간은 우습게 책을 살피니, “여보게, 배고프지도 않은가? 하긴, 책 좋아하는 분들은 책만 보면 배가 부르다고 하더니, 딱 자네하고 어울리는 말이네. 그래도 나 혼자는 심심하니 다음에 또 와서 더 보시고, 오늘은 그만 내 옆에 앉아서 이바구 좀 들으시면 어떤가?” 하고 옷소매를 붙잡는 분이 제법 계셨습니다. 해가 기울며 가게를 닫을 즈음엔 혼자서 술 한 모금 홀짝인다는 늙수그레한 헌책집지기 아재나 할배한테서 곧잘 옛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옛날엔 좋았지. 옛날엔 책만 들여놓으면 다 팔렸는데, 요새는 들여놓는 책보다 버려야 하는 책이 더 많아. 그나저나 젊은 양반은 이런 고리타분한 책이 뭐가 좋다고 읽는가?” “사장님도 아시겠지만, 겉으로는 허름하고 고리타분해 보여도, 막상 펼쳐서 읽으면 새길을 일깨우는 오랜 슬기를 이 헌책에서 찾아낼 수 있잖아요. 그래서 사장님도 이 일을 놓지 못하고 고이 이으시지 않나요?” 나무가 오랠수록 마을이 깊으면서 아늑합니다. 마을책집이 오랠수록 마을빛이 환하면서 포근합니다.


ㅅㄴㄹ


* 사진 : 서울 대방헌책방. 2003


이제는 책집이 깃든 오랜집도

이 마을도, 큰나무도,

모두 사라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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