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저녁길 (2020.11.19)

― 인천 〈모갈 1호〉



  우리는 일이 있어서 움직입니다. 가야 할 일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봐야 할 일에다가, 치르거나 추스를 일이 있습니다. 돈하고 얽힌 온갖 일이 있고, 돈하고는 동떨어진 여러 일이 있어요. 저는 집밖을 다니면서 ‘책’하고 ‘말’이랑 얽힌 일을 합니다. 때로는 일삯을 받고서 다니지만, 으레 홀로 조용히 책마실을 다니면서 이야기씨앗을 톡톡 심으면서 거닙니다.


  나라가 뒤숭숭하다며 돌아다니지들 말라고 하지만, 이처럼 뒤숭숭할수록 더 이웃을 만나서 마음을 달래고 생각을 북돋우는 이야기판을 펼 노릇이라고 봅니다. 뒤숭숭한 판을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새롭게 그리면서 가꿀 터전을 이야기하고 헤아리는 자리를 열어야지 싶어요.


  고흥에서 인천까지 오려고 시외버스랑 전철을 갈아탑니다. 길을 걷는 사람은 드뭅니다. 버스나 전철에 사람물결이 넘칩니다. 부릉이(자가용)도 끝없습니다. 물은 고이면 썩고, 바람은 갇히면 매캐합니다. 물하고 바람은 탁 트여서 해를 마주하며 흘러야 싱그러워 우리 몸을 살찌웁니다. 이야기도 물이며 바람하고 같아, 시원스레 트인 곳에서 흐를 적에 참다우면서 곱고 빛나요. 생각이나 넋이나 말도 그렇고, 책도 이와 같지요. 여러 손길을 타면서 손빛이 나는 책입니다. 여러 사람이 되읽으면서 마음빛이 피어나는 책입니다.


  헌책집은 모름지기 ‘돌림책’입니다. 이 손에서 지은 사랑을 얹은 책이 새 손길을 기다립니다. 그 손으로 빚은 살림을 담은 책이 두근거리면서 새 책손을 기다립니다. 〈모갈1호〉 골마루를 걷고 다시 걸은 다음에 책상맡에 앉습니다. 오늘 하루 숱하게 걸은 골목을 되새기면서 노래꽃을 몇 자락 짓습니다. 노래는 입에서 귀로 흘러들어 꽃이 되고, 글은 붓에서 종이로 흘러들어 꽃이 됩니다. 사람은 숲에서 보금자리로 흘러들면서 꽃이 되고, 사랑은 눈에서 마음으로 흘러들어 꽃이 되어요.


  알차구나 싶은 책을 읽다가, 쭉정이 같구나 싶은 책을 읽다가, 이냥저냥 심심한 책을 읽다가, 슬쩍 하품이 나는 책을 읽다가, 눈을 반짝일 책을 읽습니다. 왜 책마다 다르게 느낄까요? 왜 어느 책에서는 겉치레를 느끼고, 어느 책에서는 속사랑을 느낄까요? 우리가 걸어온 길에 따라서 다르게 느끼면서 받아들이는 알맹이일까요. 우리가 걷고픈 길에 맞추어 새록새록 느끼고 맞아들일 글내음일까요.


  저녁나절에 저녁빛이 들어오는 책집에 서서 바깥을 내다봅니다. 저녁별이 어디에 있나 가늠하며 책집을 나섭니다. 어둑어둑 조용한 골목을 걷습니다. 골목집 곁에는 골목책집이, 골목책집 둘레에는 골목가게가 어울립니다. 골목빛입니다.


《남편 엔도 슈사쿠를 말한다》(엔도 준코·스즈키 히데코/신영언 옮김, 성바오로, 2004.6.30.)

《고독의 철학》(존 쿠퍼 포우어스/이윤기 옮김, 까치, 1984.7.15.)

《백년을 살아보니》(김형석, Denstory, 2016.8.1.)

《팔월의 일요일들》(파트릭 모디아노/김화영 옮김, 세계사, 1991.6.25.)

《안정효의 오역사전》(안정효, 열린책들, 2013.6.15.)

《舞臺의 전설》(신정옥, 전예원, 1988.9.5.)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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