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의 발견 - 평범한 단어는 어떻게 나의 언어가 되었나
차병직 지음 / 낮은산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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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책으로 삶읽기 669


《단어의 발견》

 차병직

 낮은산

 2018.9.28.



《단어의 발견》(차병직, 낮은산, 2018)을 읽는 내내 골이 아팠다. 글쓴이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종잡기 어려웠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 한자말에 옮김말씨가 가득하여 뜬구름 잡는 줄거리가 가득했다. 글쟁이(지식인) 사이에서는 이렇게 글을 써야 멋스럽거나 ‘인문학적’으로 보일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에 적힌 어느 대목도 이 땅에 발을 붙이지 않은 채 태어났구나 싶다. 내가 스무 해쯤 앞서 새뜸(신문)을 더는 안 읽기로 한 까닭도, 누리새뜸 〈오마이뉴스〉에 5000꼭지 가까이 글을 올렸으나 그곳에 실린 붓바치(직업기자) 글을 도무지 읽을 수 없다고 느낀 까닭도, 《단어의 발견》 같은 글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이웃집 사람하고 이런 글로 이야기를 하나? 어린이나 푸름이 곁에서 이런 글로 삶을 들려주나?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 가운데 이런 글로 말을 섞는 사람이 있나? “단어의 발견”은 안 해도 된다. “말을 찾”으면 되고 “말을 보”면 된다. 적잖은 분들이 일본을 나무라고 군국주의·제국주의·식민주의·독재주의를 손가락질하는데, 정작 군국주의·제국주의·식민주의·독재주의를 일삼은 이들이 쓰던 ‘말(단어)’을 그대로 쓴다면 뭘까? 일본 정치가 엉터리라고 나무라면서, 정작 ‘엉터리 일본 정치꾼이 쓰는 말씨’를 그대로 ‘이 나라 인문학적 글쓰기’로 옮긴다면 뭘까?


덧붙인다면, ‘막짓(야만)을 보며 얌전해야 문명’이라고 하는 말이 아리송하다. 택시일꾼이며 대학생을 두들겨패 놓고서 법무부장관이 되는 막짓에 뭘 얌전해야 할까? 꽃할머니한테 앵벌이를 시키고 국회의원으로 멀쩡히 있는 막짓에 뭘 얌전해야 할까? 그리고 풀벌레나 풀꽃나무나 숲짐승은 종이책을 읽을 까닭이 없다. 이들은 잿빛집(아파트)을 세우지도 않고 싸움연모(전쟁무기)를 만들며 싸우지도 않을 뿐더러, 배움수렁(입시지옥)을 만들지도 않는다. 책을 그렇게 많이 찍어내고 읽는 사람들은 아직도 잿빛집에 싸움연모에 배움수렁을 붙잡는다. 제발 두 다리를 이 땅에 붙이고 삶을 읽으면서 말을 하면 좋겠다.


ㅅㄴㄹ


야만에 대한 겸손의 태도가 문명이어야 한다. 그 사이에서 척도 역할을 하는 것이 노골성이다. (100쪽)


그런데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의문 하나가 있다. 동물들은 왜 애당초 책을 읽지 않았을까? 그 점에 착안하면, 종이책의 유물로 전락할 위기에 놓인 출판사나 서점의 책 장사에 도움이 될 것이다. (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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