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푸른책/숲노래 만화책
기계는 싸우려고 태어나지 않았지만
《기계전사109 2》
노진수 글
김준범 그림
서울문화사
1993.4.5.
《기계전사109 2》(노진수·김준범, 서울문화사, 1993)을 처음 만나서 읽던 무렵을 떠올립니다. 먼저 《아이큐 점프》에 이레마다 나왔고, 이윽고 낱책으로 묶었습니다. 이레책(주간잡지)하고 낱책으로 1980∼90년대에 이 그림꽃을 만난 이라면 〈로보캅〉하고 〈터미네이터〉를 나란히 떠올릴 만합니다. 두 이야기하고 《기계전사109》는 맞닿을 수밖에 없거든요. 이 그림꽃에 글하고 그림을 맡은 두 사람은 이런 눈길이나 생각을 안 하기 어려웠을 테고, 우리 나름대로 기계사람을 어떻게 그려내고, 이 삶터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적에 서로 아름답고 즐거울 만할까 하는 줄거리를 새로 녹여내려고 애썼으리라 봅니다. 밑감은 얼마든지 따올 수 있되, 새로 바라보는 마음하고 새로 갈무리하는 생각이 있어야, 어린이하고 푸름이 숨빛을 건드릴 테니까요.
이레책이로도 낱책으로도 그무렵 다 읽은 사람으로서 1989∼1993년을 되새기면, 그때 배움터에 이 그림꽃책을 몰래 가져와서 읽다가 들킨 동무는 어김없이 빼앗겼습니다. 배움터에서는 불쏘시개로 태우거나 그자리에서 북북 찢어 쓰레기통에 집어던지거나, 배움터 뒤켠에서 쓰레기를 태우는 구덩이에 휙 던져넣기 일쑤였습니다.
배움터 길잡이인 어른은 왜 어린이나 푸름이가 즐겨읽거나 가까이하는 그림꽃책을 같이 읽어 보면서 이야기를 할 생각을 못 하거나 안 했을까요? 오직 글책만 읽어야 한다는 생각은 언제쯤 씻어낼 만할까요? 글책이든 그림책이든 그림꽃책이든, 이러한 책이 다루는 줄거리하고 펴는 이야기를 살펴서, 우리 나름대로 앞길을 닦는 슬기로운 생각으로 북돋울 노릇이지 않을까요?
저는 김준범 님이 내놓은 그림꽃책으로 《기계전사 109》보다 《따로따로 형제》나 《부전자전》을 조금 더 사랑스럽다고 칩니다만, 《기계전사 109》는 1989∼1993년 사이에 ‘기계사람’ 이야기를 ‘먼먼 미국이나 유럽 나라 삶’이 아닌 ‘우리 삶’으로 바라보도록 북돋운 발판이었다고 여깁니다. 끝내 ‘싸움’과 ‘죽음’이라는 틀에서 맴돌지만, 누가 살고 누가 죽느냐 하는 울타리에서 벗어날 듯하면서도 못 벗어나지만, 기계사람도 살갗사람도 해한테서 기운을 얻고 풀꽃나무를 사랑하면서 숲을 아낄 줄 아는 살림을 짓는 마음이 될 수 있다는 대목을 어느 만큼 건드리다가도 더 나아가지 못하기는 하지만, 오늘 우리 모습을 두고두고 되돌아보는 자그마한 이야기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말로는 딱 두걸음만 나오고 더 못 나온 《기계 장치의 사랑》(고다 요시이에 글·그림)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기계전사’로 못을 박다 보니 더 깊거나 넓게 못 다루었다고 하겠으나, ‘기계전사’로 못을 박더라도 ‘싸움판’ 줄거리보다 ‘삶·살림·사랑’을 어느 보금자리나 마을이나 숲에서 짓느냐 하는 줄거리를 얼마든지 짚을 수 있습니다. 《나츠코의 술》(오제 아키라 글·그림) 같은 그림꽃은 ‘술’을 그림꽃감으로 삼으나 막상 술보다는 ‘흙살림’ 이야기를 훨씬 길고 오래 깊고 넓게 짚어요.
그러나 아직 총칼이 서슬퍼렇고 그림꽃책이라면 덮어놓고 짓밟거나 깔보던 1989∼1993년에 이만 하게 나온 《기계전사 109》인 터라, 이 얼거리대로 언젠가 새옷을 입고 나와서 다시금 사람들한테 삶꽃을 노래하는 길을 톡톡 건드리는 징검돌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ㅅㄴㄹ
“저희들끼리 조촐하게 텔레비전의 명복을 빌어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텔레비전이 너무 불쌍해요.” “켈켈켈! 아이고, 배꼽이야! 기계가 장례식을 한다고! 켈켈켈!” (6쪽)
“사내야, 아직도 총알이 남아 있니?” “아악!” “쓰레기 인간!” (76∼77쪽)
“인간들! 더 이상 추적하지 않기로 하고서.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믿은 내가 잘못이지.” (98쪽)
“이 엄마는 말이다, 갈수록 인간들이 미워진단다. 이러다 모든 인간을 증오하게 될지도 몰라.” “안 돼요! 모두를 미워하지 마세요. 이 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잖아요.” “건, 건이야! 하, 하지만 인간들은 나를 버렸어. 나의 정신과 마음을 인정하지 않고 짓밟아 버렸어!” “이 세상 사람 모두가 기계로 취급해도 저에겐 소중한 엄마예요!” (109쪽)
“넌 이다음에 죽으면 기계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니?” “뭐, 뭐야? 말, 말도 안 돼. 기계인간은 싫어! 싫어! 싫어! 내 몸이 기계로 되어 있다니, 으와∼ 끔찍해!” “우리 엄마는 기계인간이었어. 아빠는 내가 어리고, 잘 몰라서 그런다고 하지만, 난 죽은 진짜 엄마보다 살아 있는 기계엄마가 더 불쌍해!” (140쪽)
“안타깝군요. 자유로운 삶을 보장할 수 있는 이곳을 버리고 멸시와 냉대로 가득 찬 인간의 세계로 돌아가려 하다니.” (142쪽)
“인간들은 아내를 얻고, 자식을 낳아 서로 사랑과 정을 나누면서 살고 있다. 우리 사이보그에겐 가족이란 게 없다. 우리도 정을 나누고 사랑하며 살고 싶다. 형식적인 자유나 평등의 보장보다 진짜 인간들 같은 행복을.” (163쪽)
“그러나, 환상이었다. 인간들에게 있어 우리는 그저 말하고 걸어다니는 기계였을 뿐이다.” (164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