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저절로 노래가 되는 곳 (2020.11.19)

― 인천 〈시방〉



  어제 슈룹을 얻었습니다. 슈룹이 없이 늦가을비를 맞으면서 인천 골목을 거닐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제 몸이나 옷은 젖으면 말리면 되어도, 어제 장만한 책이며 빛꽃틀(사진기)은 적시면 안 되겠구나 싶습니다.


  빗방울이 길바닥이며 슈룹이며 등짐이며 적시는 소리를 들으며 주안동을 걷고 간석동을 걷고 구월동을 걷습니다. 인천에서 어린날·푸른날을 보낼 무렵에는 신흥동이나 동인천부터 이곳까지 걷는 길이 썩 가깝지는 않아도 다닐 만했습니다. 호젓하고 조용하거든요. 예전에는 기찻길을 따라 걷기를 즐겼는데, 기찻길이 막히면 골목으로 접어들어 해가 흐르는 빛줄기를 살펴 길을 어림했어요. 한참 걷고 나서 마땅히 쉴 데가 없기 마련이지만 어디이고 털썩 주저앉아 땀을 훔친 다음에 집까지 다시 걸었습니다. 오늘은 마을책집 〈시방〉을 바라보며 걷습니다. 걷다가 고흥에서는 못 본 넓은잎나무 곁에 섭니다. 빗물에 젖은 줄기를 쓰다듬은 다음 “둘 얻을게.” 속삭이고서 넓은가랑잎을 줍습니다. 빗물에 젖었으니 등짐 주머니에 꽂아요.

  조그맣다면 조그마한 책집은 자그맣다면 자그마한 마을 저잣길 한켠에 깃듭니다. 책집 둘레 마을을 크게 한 바퀴 돌고, 작게 한 바퀴를 더 돌고 나서야 비로소 들어갑니다.


  어느 마을책집에 찾아가더라도 안팎이 다릅니다. 바깥이 어수선한 마을이어도 책집은 고즈넉합니다. 바깥이 씽씽 찻길이 넓더라도 책집은 고요합니다. 책집 한 곳은 마을에서 어떻게 새롭게 빛이 될까요? 크지도 넓지도 않은 책집인데 어떻게 차분하면서 정갈한 바람이 새삼스레 흐를까요?


  수수께끼는 바로 책 한 자락이 풀지 싶어요. 더 좋거나 아름다운 책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책집지기 손길을 즐겁게 타면서 가만히 이웃을 기다리기에, 이곳에서는 포근하면서 차분한 바람이 물결치듯 흐르지 싶습니다.


  누구라도 마을책집에 찾아가서 책을 열 자락이나 스무 자락씩 장만하지 않습니다. 아마 잔뜩 장만하는 분도 가끔 있을 테지만, 살며시 찾아와서 한 자락을 장만하고, 이다음에 또 와서 한 자락을 장만하는, 마음하고 마음을 잇고 이야기랑 이야기를 잇는 징검다리인 쉼터가 바로 마을책집이지 싶습니다. 둘레 마을가게도 매한가지예요. 우리는 마을가게에 ‘잔뜩 사서’ 가지 않아요.


  책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꽃을 즐기고 싶기에 마을에 안긴, 마을을 품은, 마을에서 빛나는 이곳으로 찾아간다고 느낍니다. 사뿐히 드나들 적마다 싱그러이 바람이 일렁이니, 이 바람을 넌지시 종이에 옮기면 저절로 노래가 되겠지요. 그러니 ‘시방’인 《시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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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내가 지킨다!》(이현숙, 모락, 2018.6.8.)

《고양이를 버리다》(무라카미 하루키/김난주 옮김, 비채, 2020.10.26.)

《시 읽는 엄마》(신현림, 놀, 2018.5.15.)

《파일을 열며》(서부길, 교음사, 2017.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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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책숲마실 파는곳]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683120
[숲노래 사전] https://book.naver.com/search/search.nhn?query=%EC%88%B2%EB%85%B8%EB%9E%98&frameFilterType=1&frameFilterValue=3595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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