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세 마리코 13
오자와 유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0년 10월
평점 :
품절



숲노래 푸른책/숲노래 만화책

어디에나 글감이 있으니



《80세 마리코 13》

 오자와 유키

 이은주 옮김

 대원씨아이

 2020.10.31.



  우리가 사는 모든 곳에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야기가 없는 데란 없어요. 우리한테 삶이 있으면 이야기가 있어요. 그리고 이 이야기에는 나은 이야기도 안 나은 이야기도 없습니다. 더 좋은 이야기도 덜 좋은 이야기도 없어요.


  더 나은 삶이란 무엇일까요? ‘더 나은 삶(삶의 질 향상)’이란 이름을 내걸면서 나라에서 이 길(정책·행정)이나 저 길을 펴곤 하는데, 왜 더 나은 삶길이어야 할까요? 오늘 이곳에서 스스로 즐겁게 나아가는 길이어도 넉넉하지 않을까요? 낛(세금)을 받아 곳곳에 쓰기보다는 이 낛을 사람들한테 삶돈으로 돌려주면 될 노릇 아닐까요?



“생명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마리코, 전화기 망가져.” “너무하네요. 개가 무슨 쓰레기인 줄 아나.” (18쪽)



  우리는 늘 우리 삶을 누리기에 우리 이야기를 씁니다. 네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요, 저 이야기가 아닌 이 이야기입니다. 먼발치에서 흐르는 삶을 구경하면서 구경글(관전평)을 쓸 까닭이 없어요. 스스로 누리고 짓는 삶을 한결 즐거이 들여다보면서 삶글을 쓰면 됩니다.


  우리 오늘이 좀 부끄럽거나 창피해서 쓰기가 어렵나요? 무엇이 부끄럽고 무엇이 창피한가요? 부끄럽거나 창피한 삶은 글로 못 쓴다면, 자랑하거나 내세울 일이 있어야 글로 쓰나요?


  글에 담을 얘기는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 삶이에요. 네 삶도 남 삶도 아닌 우리가 스스로 누리는 삶입니다. 기쁨도 슬픔도 모두 우리 삶이니, 기쁨이며 슬픔을 쓰면 돼요. 기쁘거나 슬픈 하루를 쓸 줄 안 다음이라면 자랑이나 보람도 쓸 만하지만, 자랑이나 보람만 쓰면서 슬픔이며 아픔을 감추거나 꺼린다면, 겉글이나 겉치레로 기울기 마련입니다.



‘치에조 씨는 생명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평등하게 걱정하고 있는 거야.’ (42쪽)


‘글로 담아 볼까. 쿠로를 주웠을 때에도 그랬던 것처럼, 가아코의 기록을.’ (76쪽)



  글쓰는 할머니가 나오는 그림꽃책(만화책) 《80세 마리코 13》(오자와 유키/이은주 옮김, 대원씨아이, 2020)에서 드디어 여든 살 할머니가 스스로 무엇을 쓰면 되는가를 제대로 깨달아서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여든 살 할머니는 남이 버린 늙고양이를 건사해서 함께 삽니다. 열석걸음째에 이르면 남이 버린 늙개까지 건사해서 함께 살기로 합니다.


  혼잣몸도 건사하기 수월하지 않은 여든 살 할머니는 어떻게 늙고양이랑 늙개까지 건사할 마음이 될까요? 그리고 두 ‘늙벗’을 건사하는 고단한 나날을 보내며 어떻게 ‘이런 하루야말로 글로 남겨야지’ 하고 생각해낼까요?



‘가아코 기록해야지. 이 느낌, 아이를 키우던 때가 생각난다. 그때는 여러 편의 연재를 맡아서 잠잘 시간도 없었지. 애를 업고 글을 쓰느라 어깨 결림이 한계를 돌파할 것 같았어.’ (90쪽)


‘시아버지가 입원하고 이리저리 오가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그때 어떻게 밥을 먹었더라. 용케 버텼네. 그러고 보니 그때 영감은 아―무것도 안 도와줬지.’ (91쪽)



  여든 할머니는 날마다 지쳐 쓰러지려고 하더라도 용을 쓰며 몇 줄을 끄적입니다. 이러며 한창 젊던 무렵 ‘곁사내는 집안일이고 뭐고 하나도 안 도운 일’을 떠올립니다. 여든이란 나날을 걸어왔기에 그동안 지낸 삶은 오롯이 글감입니다. 스물을 살았어도, 또 열 해를 살았어도, 이 삶은 모두 글감이에요.


  나이가 어리거나 젊기에 쓸 얘기가 없지 않아요. 어리면 어린 대로 마주한 모든 숨결을 그리면 됩니다. 젊으면 젊은 대로 맞닥뜨린 모든 이웃을 그리면 되어요.


  더 오래 살았기에 글이 깊지 않습니다. 생각이 깊으면서 삶을 마주한 사람이 쓰는 글이 깊습니다. 아직 젊기에 글이 얕지 않아요. 생각이 얕으면서 슬픔이나 아픔이나 멍울이나 창피나 시샘이나 부러움 같은 마음을 감추는 이들이 쓴 글이 얕습니다.



“애당초에 그 버린 주인? 그 여자가 나쁜 거잖아. 뒷감동도, 양심의 가책도 모두 당신한테 떠넘기고서 도망친 거 아냐.” “이번만은 초코 말에 동의한다! 넌 주인의 책임 방기에 재수 없게 조우했을 뿐인데, 그렇게까지 떠맡을 필요 없잖아.” (118∼119쪽)


“정말로 그런 걸까.” “뭐?” “전 그 주인을 비난할 수 없어요.” (120쪽)



  할머니를 다루는 그림꽃책 《80세 마리코 13》은 그림꽃책이니까 그리는 얘기일 수 있으나, 할머니를 비롯한 우리 모두한테 ‘쓰고 싶은 글’이 있으면 어떡하면 된다는 얘기라고 하면 어울리겠다고 여깁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대로 씁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고 살아갑니다. 스스로 생각하여 움직이고 살아간 날을 고스란히 적습니다. 스스로 적은 글에서 피어나는 이야기는 오직 우리 넋이요 빛이자 꿈이고 사랑입니다.


  서로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이야기는 먼발치에 있지 않아요. 우리가 우리 하루를 그려내기에 서로 가슴이 찡합니다. 우리가 속내를 안 감추서 씩씩하게 밝히기에 서로 손을 내밀면서 다독여 주고 달래 줍니다. 우리가 창피나 부끄럼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우리 삶이 어떠한 길이었나를 밝히기에 서로서로 다가와서 동무나 이웃이 돼요.



‘나를 따라준 걸까? 사는 게 서투른 가아코. 가아코 나름대로 만난 상대를 사랑하려고 그런 거야. 가아코는 열심히 살고 있었어.’ (152쪽)



  힘껏 살며 힘껏 씁니다. 기운껏 부딪히며 기운껏 적습니다. 재주껏 다가서며 재주껏 옮깁니다. 어려워야 하지 않습니다. 굳이 쉬워야 하지도 않습니다. 즐거이 마주하고 기쁘게 바라보며 반가이 끌어안으면 됩니다.


  여든 할머니가 늙고양이랑 늙개를 사랑스레 끌어안듯, 열 살 어린이가 나무를 동무로 삼아 신나게 타고 놀듯, 마흔 살 아저씨가 갓난쟁이 똥기저귀를 노래부르며 갈고서 빨래를 삶듯, 온하루는 오롯이 글감입니다. 온하루는 오롯이 아름다이 빛나는 삶이거든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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