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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 도시소설가, 농부과학자를 만나다
김탁환 지음 / 해냄 / 2020년 8월
평점 :
숲노래 책읽기
인문책시렁 146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김탁환
해냄
2020.8.28.
물소리에 스미면서 별빛에 빨려든 적이 있는가. 곡성 섬진강 뿅뿅다리에서 처음 접한 아름다움이었다. (43쪽)
서울이 아니면 모두 지방이고, 지방이란 곧 촌이란 등식이 성립했던 것이다. 서울 중심주의는 지금도 여전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지방 중소도시를 ‘촌’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반복되는 차별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70쪽)
그러나 막지 못했다고 그동안 이어온 활동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131쪽)
“그냥 저처럼 들어와 보시죠? 논에 담긴 물과 흙을 맨살로 느껴 보세요.” 장화를 벗지 않고 다시 물었다. “거머리…… 없나요?” “있죠. 많이.” “물지 않습니까, 맨발인데?” “물 틈을 주지 않으면 됩니다.” (215쪽)
어느 마을로 가서 누구와 이웃하며 살 것인가. 거기 당신의 미래가 있다. (276쪽)
소설지기가 쓴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김탁환, 해냄, 2020)는 ‘미실란’이라는 곳을 곡성에서 이끄는 분한테 바치는 책이다. 이렇게 한 사람한테 바치는 이야기를 소설처럼 쓸 수 있네. 새삼스럽지 않지만 서울내기인 김탁환 님이 별빛도 냇물소리도 흙내음도 논물도 사름이나 벼빛도 모를 수밖에 없을 터이지만, 이 모두를 몰라도 소설을 쓸 수 있고, 서울에서 살 수 있다는 대목을 다시 생각해 본다.
그렇다, 오늘날 거의 모두라 할 사람이 서울이나 큰고장에서 산다. 이제 웬만한 사람은 ‘마당 없는 집’이자 켜켜이 쌓은 잿빛집(아파트)에서 산다. 어느덧 웬만한 사람은 ‘혼씽씽이(자가용)’를 모는데, 하나 아닌 둘셋을 몰기도 한다. 그루(주식)나 벼락종이(복권)를 안 건드리고, 보임틀(텔레비전)을 안 키우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길이 없기도 하다.
물이며 흙을 맨살로 느껴 본 적이 없이 어떻게 역사소설을 쓸 수 있었을까? 다른 사람이 갈무리한 글이나 책을 살펴서 이리 엮고 저리 짜면 역사소설이 되는가? 바람이며 눈비를 맨살로 느끼지 못하는, 아니 우리를 둘러싸거나 감싸는 이 푸른별을 온몸으로 느끼지 못하는 채 ‘글로 글을 쓰는 길’이 된다면, 그러한 글로 이 푸른별을 더없이 푸르게 누리는 길을 어떻게 열 만할까?
나는 숲길을 맨발로 걷곤 한다. “발 안 아파요?” “발이 왜 아파야 하지요?” “네?” “그 딱닥한 신을 꿰고 걸을 적마다 풀잎이며 흙이 아파서 외치는 소리가 안 들리나요?” “네?” 모기가 팔뚝에 앉아 피를 빨면 물끄러미 바라본다. “모기 무는데 안 아파요?” “제 몸 어느 구석에서 피가 막혔나 봐요.” “네?” “모기는 바늘로 우리 몸에서 막힌 데를 뚫어 줘요.” “네? …… 안 간지러워요?” “한의원 가서 바늘(침) 맞고서 아프거나 간지러우셔요?”
서울에서 소설을 쓰는 그분으 이제는 서울을 떠나도 좋겠다. 굳이 서울집을 버려야 하지는 않는다. 그 집은 그대로 두되, 마음이 맞는 시골자락을 찾아 조그마한 빈집 하나 얻어서 그 시골집에서 글을 쓰시면 좋겠다. 한동안 소설쓰기를 쉬신다고 했으니, 온나라를 두루 돌면서 ‘서울사람으로서 서울하고 아주 멀리 떨어져 지낼 만한 숲자락’을 찾아나서면 좋겠다. 그렇게 서울을 떠나 시골자락에서 글샘을 가꾸면, 마을도 서울도 나라도 이웃도 모두 새롭게 바뀌리라. ㅅㄴ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