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보여주기 옷 : ‘내 취향이 아니어도 홍대에서 어울리며 놀려면 다른 홍대 놀이꾼에 맞추어서 옷을 입어야 하고, 홍대 클럽이나 바에서 흐르는 노래를 들어야 한다’고 여기던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홍대 클럽이나 바에서뿐이랴? 공무원이 되어 동사무소만 드나들어도 ‘공무원스럽게’ 차려입지. ‘커뮤니티에 끼고’ 싶어서 스스로 안 바라는 옷차림이나 말씨나 몸짓을 꾸미면서 하는 나라가 아닌가. 이른바 바람(유행)이란 이름으로 다같이 휩쓸려 움직이는걸. 사람들이 많이 본다는 ‘천만 영화’라면 그 영화를 봐야 이야기판에 섞인다고 여긴다. 사람들이 많이 읽는다는 ‘백만 책’이라면 그 책을 읽어야 이야기자리에 낄 수 있다고 여긴다. 스스로 끼리질이나 무리질을 하면서 그 물결이나 바람을 누린다는 허울을 뒤집어쓰려는 셈이다. 스스로 어떤 숨결인가를 생각하기를 잊고, 스스로 어떤 사랑인가를 헤아리기를 안 하고, 스스로 어떤 꿈인가를 그리기를 멈추기에, 천만 영화나 백만 책에 휩쓸릴 뿐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 이쁘게 보여주기’가 될 만한 머리꾸미기에 옷꾸미기를 한다. ‘다른 사람한테 뭔가 멋있거나 그럴듯하게 보여주기’가 되도록 서울 표준말을 쓰려 하고, 글쓰기나 말하기도 ‘인문지식이 널리 드러나는 척하는’ 갖은 일본 한자말치레에 영어치레로 범벅이 된다. 보여주기 옷을 몸에 걸치니 스스로 몸을 안 가꾼다. 보여주기 영화를 들여다보니 스스로 마음을 안 돌본다. 보여주 책을 거머쥐니 스스로 생각을 안 짓는다. 우리가 갈 길은 ‘남들이 가는 길’이 아닌 ‘내가 스스로 갈 길’이지 않을까? 우리가 누릴 삶은 ‘남들한테 번듯하게 보여줄 모습’이 아니라 ‘우리 온사랑을 들여 우리 손으로 차근차근 가다듬어 펴는 꿈길’이지 않을까? 2018.8.19. ㅅㄴ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