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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여는 창 언어 ㅣ 인류의 작은 역사 5
실비 보시에 글, 메 앙젤리 그림, 선선 옮김, 김주원 감수 / 푸른숲주니어 / 2007년 11월
평점 :
숲노래 어린이책
책으로 삶읽기 612
《내일을 여는 창, 언어》
실비 보시에 글
메 앙젤리 그림
선선 옮김
푸른숲주니어
2007.11.25.
《내일을 여는 창, 언어》(실비 보시에·메 앙젤리/선선 옮김, 푸른숲주니어, 2007)는 어린이한테 읽히려고 썼다는데, ‘말’하고 ‘언어’ 두 가지 말을 섞는다. 어린이한테 이런 두 말을 써도 좋을까? 왜 말을 ‘말’이라 않고 ‘언어’라고 해야 할까? ‘말’을 프랑스말로 어떻게 옮기려는가?
실제로 한국어에서 순 토박이말은 전체의 4분의 1밖에 안 된다고 해요. 나머지는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말이라는 것이지요. 만약 순 토박이말만 써야 한다면 아주 불편할 거예요. (99쪽)
이 책을 쓴 사람은 우리말을 얼마나 알기에 이런 글을 썼는지 아리송하다.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책에 흐른다. 어느 나라이든 이웃나라 말이 흘러들어서 뿌리내린다. 그 나라에 없는 살림을 다루는 말이라면 그 살림하고 말이 함께 들어온다. 그런데 이때에 이웃나라 말을 고스란히 쓰기도 하지만, 모든 겨레나 나라는 그들 나름대로 바깥말을 가다듬거나 손질해서 쓰기도 한다.
우리말은 중국을 섬기던 옛임금에다가 일본제국주의에 빌붙은 먹물붙이가 수두룩한 탓에 중국 한자말하고 일본 한자말이 끼어들려고 했다. 오늘날에는 영어하고 번역 말씨가 끼어들지. 조선 임금이 중국을 섬기면서 그들 벼슬아치가 쓴 중국 한자말을 우리말이라고 해야 할까? 일본제국주의에 빌붙은 이들이 끌어들인 일본 한자말을 우리말이라고 해야 할까? 해방 뒤로 밀물결을 치는 영어를 우리말이라고 해야 할까?
“순 토박이말만 써야 한다면 아주 불편할 거예요(99쪽)” 같은 말은 더더욱 어린이 넋을 좀먹을 만한 대목이다. 어느 누가 “순 토박이말”만 써야 하는가? 우리는 ‘생각을 마음에 담아서 나눌 말’을 쓸 뿐이다. ‘우리 삶을 찬찬히 밝혀서 서로 생각을 주고받는 말’을 쓴다. 이러면서 더 어리거나 여린 사람을 헤아리면서 말결을 가다듬어야겠지. 어린이가 알아듣지 못할 뜬금없는 프랑스말이나 영어나 중국 한자말이나 일본 한자말이나 번역 말씨가 아닌, 어린이하고 어깨동무할 쉽고 즐거우며 사랑스러운 우리말을 어른들이 찾아내고 캐내고 가다듬고 엮고 지어야 할 테고.
어떤 언어를 다른 언어로 완벽하게 표현할 수는 없어요.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단지 단어와 문법을 외우는 것이 아니거든요. (109쪽)
‘바깥말만 낱말하고 말틀 외우기가 아니’지 않다. 우리가 이 땅에서 쓰는 말도 낱말하고 말틀만 외워서는 못 쓴다. 삶을 그리는 말이니 삶말을 쓴다. 살림을 드러내니 살림말을 쓴다. 사랑하고 싶은 하루이니 사랑말을 쓰지.
세상과 만물이 생길 때 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말이 지닌 창조의 힘을 이야기하는 것일 테지요. (21쪽)
《내일을 여는 창, 언어》는 한글로 적은 책이지만 무늬만 한글이다. “말이 지닌 창조의 힘을 이야기하는 것일 테지요”는 무슨 소리일까? 이런 번역 말씨로 프랑스말을 옮겨서 어린이책을 내놓으면 어린이는 어떤 말씨를 읽으면서 배우라는 뜻일까?
→ 온누리 모두가 태어날 적에 말이 있었어요. 새로 짓는 말힘을 이야기한답니다.
말짓기란 생각짓기이다. “순 토박이말로 고쳐쓰기”를 하는 길이 아닌, “우리 스스로 생각을 살찌우거나 북돋우도록 새로 지으려는 마음으로 말을 새롭게 바라보면서 우리 손으로 짓는” 길이다.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삶이 있고, 삶이 있으면 삶이 있으며, 삶이 있으면 사랑이 있다. 사랑이 없다면 삶이 없을 테고, 삶이 없다면 말이 없겠지. ‘말·삶’을 나란히 헤아려야 할 텐데, 여기에 하나를 얹어 ‘말·삶·넋’으로, 하나를 또 얹어 ‘말·삶·넋·빛(사랑)’으로 바라보아야 비로소, 말이 왜 새날을 여는 길인가를 밝힐 만하리라. ㅅㄴ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