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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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하게 나무를 봐 (2020.2.14.)
― 수원 〈마그앤그래〉
경기 수원시 권선구 세권로316번길 49, 상가 2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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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마실로 여러 고장을 돌다가 생각합니다.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혼마실’이에요. 재미나게 태어난 말은 신나게 가지를 뻗으면서 사람들 입이며 혀이며 손에 녹아듭니다. 이처럼 새롭게 말을 지어서 누릴 줄 아는 이 땅 사람들이니, 온갖 자리 갖은 살림을 나타낼 숱한 말씨도 얼마든지 앞으로 새삼스레 가다듬을 만하리라 여깁니다.
서울에서 볼일을 마치고 영등포역에서 기차를 탑니다. 서울에서 수원 사이는 한달음입니다. 자리에 앉아 글꾸러미를 펼쳐 노래꽃을 한 자락 쓰고 보니 어느새 내려야 할 때입니다. 얼른 글꾸러미를 어깨짐에 넣고 짐을 꾸려서 내립니다. 밀물처럼 출렁이는 사람물결 한복판인 수원역이지만, 귀로는 노래를 들으면서 글을 마저 씁니다. 쓰고픈 글을 손으로 다 쓰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나고, 어떻게 〈마그앤그래〉로 갈까 하고 생각하다가 택시를 탑니다.
택시 앞자리에 앉아 하늘을 바라봅니다. 수원 하늘은 서울 하늘에 대니 살짝 파란 기운이 비칩니다. 수원은 서울보다 숨쉬기 좋은 고장이로군요. 이 고장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이 부디 하늘빛을 품을 줄 알면 좋겠어요. 자동차 이름이나 누리놀이 판짜임을 읽어내는 눈길 곁에 하늘빛을 읽으면서 삶을 헤아리는 숨결을 건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택시에서 내린 다음에는 어디로 걸어야 하나 갈피를 못 잡습니다. 네모난 길에 네모나게 높은 겹집이 가득합니다. 손전화를 켜서 길그림을 들여다봅니다. 길그림을 들여다보아도 왼쪽이 맞는지 오른쪽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쪽으로 가 보다가 아니구나 싶어 뒤로 돌아섭니다. 바야흐로 책집이 깃든 자리를 찾았고, 둘레에 어떤 나무가 어떻게 자라나 하고 돌아봅니다.
디딤돌을 밟고 천천히 올라갑니다. 이곳에 책집이 고이 자리잡은 줄 아는 마을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바깥에서 보면 책집 간판은 파묻힐 듯합니다. 입시학원 걸개천이 크게 나부낍니다. 돌림앓이가 온나라에 퍼지는데, 이런 판이라면 ‘대학교란 곳에 가도 부질없’는 줄 느끼는 푸름이가 나올까요. 전기가 멈추기 앞서 나라 곳곳이 멈추어 버리면, 삶자리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손수 가꾸는 길로 가야겠구나 하고 느낄 어린이가 나올까요.
문을 열고 들어서는 〈마그앤그래〉는 딴 나라입니다. 네, 다른 나라입니다. 네모나게 딱딱한 도시 한복판에 이런 샘터가 있습니다. 끝없는 모래벌 어딘가에 조용히 깃든 샘터예요. 큼직한 창문으로 햇볕이며 햇빛이며 햇살이 듬뿍 들어옵니다. 창문을 틔운 책집이 이토록 밝으면서 아름답습니다. 〈마그앤그래〉를 단골로 삼는 분이라면 땅밑에 커다랗게 꾸민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같은 데는 다시는 가고 싶지 않으리라 여길 만하지 싶어요. 전깃불을 켜 놓는 책집이 아닌, 아침 낮 저녁으로 흐르는 다 다른 빛살을 누리면서 책을 손에 쥐는 하루란, 종이꾸러미를 넘어서는 이야기를 모두한테 베풀지 싶습니다. 《느긋하게―훗카이도》(남자휴식위원회/홍민경 옮김, 생각정거장, 2018)는 어떤 걸음걸이를 풀어놓은 책일까요. 《눈구름 사자》(짐 헬모어 글·리처드 존스 그림/공경희 옮김, 웅진주니어, 2018)에 나오는 눈구름 사자는 아마 모든 집에 다 있겠구나 싶습니다. 《형아만 따라와》(김성희, 보림, 2019)를 펴 보니, 형아는 언제나 동생한테 기대면서 동생은 또 형아하고 사이좋게 손을 잡는 걸음걸이로군요. 《봄을 만드는 요정》(시빌 폰 올페즈 글·지그린드 숀 스미스 퀼트/노은정 옮김, 미래아이, 2008)은 천에 한 자락으로 담은 그림책입니다. 멋진 이야기를 천에 담아낸 손길이 이쁘장합니다. 다만, 책 엮음새는 아쉽네요. 펴낸곳에서 조금 더 마음을 기울이고 손길을 뻗으면 달라졌을 텐데요.
창밖으로 나무를 바라볼 수 있는 책집이 이 나라에 몇 곳쯤 될까요. 나무를 바라보다가 하늘빛을 헤아릴 수 있는 책집이 얼마쯤 될까요. 나무를 어루만지고, 하늘을 품고, 냇물을 노래하고, 풀밭에 맨발로 뛰노는 터전을 어린이도 어른도 다같이 누리는 앞날을 그리고 싶습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