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학문말 : 학문말을 새로 하려면, 그 학문을 하는 사람이 해야겠지. 그런데 때로는 그 학문을 안 하는 사람이 뜻밖에 매우 고마운 귀띔을 밝혀 주기도 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하고 물을는지 모르나, 학문을 하는 사람하고 학문을 안 하는 사람은 ‘보는 눈·보는 곳’이 달라서,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너무 마땅해서 굳이 더 파고들지 않는 데를 학문을 안 하는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아주 깊숙히 파고들며 살다가 문득 귀띔을 한다.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까다롭거나 어렵다고 여기는 곳이라 해도 학문을 안 하는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터라(까다로운지 안 까다로운지를 생각할 수도 없는 터라) 불쑥 매우 쉽게 풀잇길을 내놓기도 한다. 이를 스스럼없이 바라보면서 받아들인다면 학문말뿐 아니라 학문은 매우 발돋움하겠지. 어느 곳에서나 매한가지이다. ‘수학’판이든 ‘과학’판이든 ‘요식업’판이든 ‘목공’판이든 ‘운전업’판이든, 다들 전문용어만 쓰려 한다. 책마을에서도 똑같으니, 책마을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스며든 일본 한자말이나 일본말이나 일본 영어가 아니면 인쇄도 제본도 할 수 없다고 여기기도 한다. 학교를 보라. 우리는 왜 ‘교장·교감·교사’ 같은 일본말을 그냥 쓸까? 이 이름을 참말 그대로 써야 할까? 왜 학교는 ‘원족·소풍·수학여행·체험학습·현장학습’ 같은 이름만 쓸까? 왜 한국말은 학교에 깃들지 못할까? 철학이나 종교나 문학은 어떠한가? 정치나 경제나 무역은 어떠한가? 사진이나 그림이나 조각은 어떠한가? ‘어느 학문을 깊이 판 사람만 그 학문하고 얽힌 말을 새로짓거나 손질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어쩌면 학문말은 그냥그냥 내버려두라는 뜻일는지 모른다. 삶자리 어디에서나 저마다 울타리를 쌓고서 ‘여기는 내 전문이야, 넘보지 마!’ 하면서 끼리끼리 놀면서 자격증하고 졸업장을 내세워서 남남으로 갈리려는 몸짓이지 않을까. 과학자는 아기를 낳으면 아기한테 무슨 말을 써야 사랑스러울까? 축구선수나 농구선수는? 요리사는? 택시일꾼은? 의사는? 판사는? 철학자는? 공무원은? 교사는? 그리고 ‘아기를 사랑하는 어머니나 아버지’는? 전문용어가 전문용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울타리에 갇힌 채 헤매는 까닭은 오직 하나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사랑을 나누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1994.7.5.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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