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연히 〈오마이뉴스〉에 실린 기사 하나를 보았는데, 이 기사는 〈문화연대〉에서 낸 성명서 하나를 거의 고스란히 옮겨놓은 ‘퍼오기 기사’였다. 이 퍼오기 기사 원글을 인터넷에서 찾아서(http://www.culturalaction.org) 읽어 보았다. 〈시민의신문〉이 문을 닫게 되고 〈시민사회신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일을 ‘도저히 환영할 수 없다’고 밝히는 성명서.

 이 성명서를 읽으면, ‘그래, 그렇다면 잘못이 누구한테 있고, 이 잘못은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 하는 알맹이를 잡을 수 없다. 〈시민의 신문〉이 문을 닫게 한 주범인 이형모 이사를 나무라는 건지, 이형모 이사를 감싸안은 ‘한국 사회 대표 시민사회단체’를 나무라는 건지 알 수 없다. 또한, 애써 이런 답답이들과 싸우며 곧은 목소리를 내온 〈시민의 신문〉 기자들 외침에 귀를 닫고 눈을 감아 온, 주류 매체와 비주류 매체와 주류 시민사회단체와 비주류 시민사회단체를 탓하는 건지도 알 수 없다. 누구 들으라고 쓴 글이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제대로 짚기나 하고 쓴 글인지 종잡을 수 없다. 문득, 이 단체 〈문화연대〉라는 곳은 그동안 무엇을 해 왔는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딱한 것은, 이런 〈문화연대〉 성명서를 거의 그대로 ‘퍼오기 기사’로 실은 〈오마이뉴스〉 기사.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올린 그 기자는, 앞뒤 흐름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조금이라도 살핀 뒤 그런 ‘퍼오기 기사’를 썼는가? ‘퍼오기 기사’이니 취재도 안 하고, 책상 앞에서 인터넷만 끄적거리다가 썼을는지 모른다. 둘레에서 몇 마디 나온 이야기를 어느 만큼 그러모아서 쓰기도 했을 테고.

 하지만 〈문화연대〉에서 성명서를 쓴 사람, 또 〈오마이뉴스〉에서 퍼오기 기사를 쓴 사람은 모르리라. 자기들이 얕은 생각으로 함부로 쓴 그런 글 하나 때문에 참과 거짓이 엉뚱하게 알려지게 되는 줄은. 그리고 그 엉뚱하게 알려지는 글 때문에 피해를 입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자기가 쓰는 글에 ‘비판’이라는 꼬리말을 단다고 해서 그 글이 비판인가? 비판이란 아무나 하는 말이 아니다. 비판을 하려면, 누구보다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하며, 누구보다 더 깊이 사랑해야 하며, 누구보다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비판이 나올 수 없다. 깊이 파고들지 않은 채, 깊이 사랑하지 않은 채, 많은 시간을 쏟지 않은 채 내뱉는 말은 ‘헐뜯기’일 뿐이다.

 내가 책소개 기사를 거의 안 읽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책소개 기사를 쓰는 기자나 학자들은 ‘자기가 소개하는 책’을 제대로 읽지 않는다.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며 읽지 않는다. 종이에 박힌 활자는 읽을 줄 알아도, 종이 활자에 담은 지은이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다. 책 하나 펴내는 사람은 ‘돈 되는 상품’으로 책을 펴내지 않는다. 뭐, 이런 상품으로 펴내는 사람도 적잖이 있겠지. 그리고 상품을 소개하는 글을 쓰는 기자도 있을 테고. 다만, 나는 상품으로 책 만드는 사람과 상품으로 만들어진 책을 소개하는 기자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책을 펴내려고 했던 사람이 내놓아 우리 앞에 보여지는 것은 ‘한 권 책(이백 쪽이든 사백 쪽이든)’이지만, 이 한 권을 이루고자 기나긴 세월 땀-사랑-믿음-다리품 모두를 담았다. 서른 해 한삶이 책 하나로 바쳐지기도 하고, 예순 해 한삶이 책 하나로 바쳐지기도 한다. 책 하나를 펴내고자, ‘다른 책’ 10만 권을 읽은 사람이 있고, 책 하나 펴내고자, 세상사람 1만 사람을 만나거나 부대낀 사람이 있다.

 책은 줄거리가 아니다. 그래서 책소개 기사는 줄거리 소개가 아니다. 줄거리 소개로 그치는 기사라면, 또는 지은이와 출판사 요새 형편을 알리는 기사라면, 그리하여 책 하나 펴내는 속뜻과 깊은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기사라면, 모두 쓰레기라고 느낀다. 쓰레기일 수밖에 없지. 그 기사를 읽는 우리들 시간을 아깝게 내버리게 하는 쓰레기, 그 기사가 실린 신문을 더럽히며 종이를 헤프게 버리게 하는 쓰레기.

 책을 읽을 때, 첫 쪽부터 맨 마지막 쪽까지 꼼꼼히 살펴야 ‘읽었다’고 말할 수 없다. 줄거리를 다 외었다고 책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으랴? 몇 쪽에 무슨 이야기가 적혀 있는 줄 달달 읊는다고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없다. 지은이 해적이를 외우고 출판사 도서목록을 죽 적어내려간다고 해서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나? 참말로 책을 ‘읽었다’고 말하려면, 그래서 책을 ‘소개한다’고 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책 하나에 담긴 온 우주를 말하지 못하면서 책을 소개한다는 글을 쓰는 일이란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몹쓸 짓인가? 책 하나에 담은 한 사람 온삶을 자기 살갗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책을 소개한다고 끄적거리는 일이란 얼마나 얼치기 노릇이란 말인가? 책 하나로 나누려는 사랑과 믿음이 얼마만한 크기이며 부피인지 껴안아 보지 않고서 섣불리 읊는 칭찬과 비판이란 얼마나 부질없는 말장난인가? 책을 펴내는 사람은 ‘사람들한테 제대로 읽히기’를 바란다. ‘많이 팔리기’가 아니라 ‘두루 읽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책을 소개한다는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매무새로 글을 쓰는가? 지난 5월 17일에 세상을 떠난 권정생 할아버지는 ‘사람들한테 더 많이 팔리고 읽힐 수 있던 길’을 깨끗이 접어두고, ‘사람들이 어느 때라도 알아보며 찾아 줄 수 있는 길’을 어렵게 걸어갔다. 권정생 할아버지는 자기한테 돌아올 인세를 왜 자기 형제나 피붙이한테 건네지 않고, 북녘 어린이한테 주고 싶어했을까? 이 숙제를 스스로 풀어내지 않으려는 기자라면, 지금 곧바로 글쟁이 노릇을 집어치우고 다른 밥벌이를 알아볼 일이다. (4340.5.2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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