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가을물 (2010.11.9.)

― 서울 용산 〈뿌리서점〉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21길 25, 지하

02.797.4459.



  가을물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높은집하고 자동차가 흘러넘치는 서울이라 하더라도 가을빛이 가득한 나무가 곳곳에 있습니다. 이 가을빛 품은 나무가 없다면 서울이란 얼마나 차갑거나 메마를까요. 몇 그루 은행나무가 노랗게 하늘이며 길을 물들이기에 비로소 마음을 풀고 생각을 열며 사랑을 떠올리는 하루가 될 수 있지 싶습니다.


  헌책집 〈뿌리서점〉으로 들어서기 앞서 이 가을빛이 넉넉한 바깥에서 바람을 마십니다. 마침 책집지기 아저씨가 자전거를 타고 책집으로 오십니다. 집에 볼일이 있어 다녀오신 듯합니다. 묵직한 짐자전거는 책집지기하고 한삶을 보낸 벗님입니다.


  그리 묵은 사진잡지는 아닌 《월간 사진》 416호(2002.4.)를 집는데, 최민식 님이 ‘세계걸작사진’이라는 꼭지를 9번째 쓰면서 “종착역(Alfred Stieglitz,1893)”을 다루고, 강운구 님 사진을 보여주면서 정식상 님 글로 “자연을 닮은 집” 이야기를 들려주며, 《서울, 1막 3장》이라는 사진책 비평하고, 안드레아스 파이닝거 님 “사진구도의 원칙”이 일곱 벌째 실립니다. ‘포토 탐방’이라는 이름으로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님 만나보기 기사가 실립니다.


.. 서울올림픽 이후 의욕적으로 출범한 저희 출판사는 시작부터 사진 전문 출판사를 표방했어요. 하지만 이 땅에서 전문출판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더군요. 당시 주간으로 계시던 영화감독 여균동 씨가 영화판으로 떠나고, 거름출판사를 운영하면서 눈빛에 자금을 대주던 유대기 사장도 지원 포기 의사를 비치면서 제게 인수할 것을 제의하더군요. 즉각 응락하지 못하고 갓 결혼한 집사람과 낙산해수욕장에 갔어요. 출판사를 인수할 능력도 역량도 없어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파도는 밀려오고 ……. 집사람이 제게 용기를 많이 주더군요. 당신이 맡아 해 보라고 ……. 당신이 적임자인 것 같으니 끝까지 가 보자고 하더군요. 사실 봉급도 몇 달치 밀린 형편이었는데도 집사람이 용기를 주더군요. 집사람이 몰래 모아 둔 적금(오백만 원)을 해약해 주었지요. 그것이 종자돈이 됐어요. 그걸 아직 다 갚지도 못했는데 …… 제게 모든 책들이 소중해요. 모두 어려운 여건에서 나왔으니 애착이 가지요. 굳이 고르라면 작년에 작고하신 이경모 선생의 사진집 《격동기의 현장》을 꼽고 싶어요. 여순반란사건의 현장을 기록한 사진들이 묻혀 있다가 처음 빛을 보게 되었지요. 역사를 기록하는 사진의 힘을 유감없이 잘 보여준 사진집이지요. 누두사진, 살롱풍의 풍경사진만이 풍미하던 시절에 역사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사진집이 나왔으니 놀랄 만한 일이었지요. 정작 사진계는 침묵하고 다른 분야의 독자들이 평가해 주더군요 ..


  앞으로 해가 더 가고 또 가고 나면, 이 몇 마디 이야기가 새삼스레 빛날 수 있겠지요. 어느 책이나 잡지이든 마찬가지인데, 작거나 낮은 목소리를 담을 적에 한결 오래오래 나아가지 싶습니다. 높거나 잘난 목소리를 담는 책이나 잡지는 어쩐지 반짝이다 사라지지 싶어요.


  온누리에는 온갖 책이 고루 있으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썩 불꽃 같지 않으면서 살짝 반짝이다 사라질 책이 좀 지나치게 나온다고 느껴요. 두고두고 읽거나 읽힐 만하지 않다면 구태여 종이를 묶어 책으로 펴낼 만한지 모르겠습니다. 소모품이나 소비품으로, 다시 말해 한 벌 읽고 잊어버릴 책이라 한다면, 그냥 누리책(전자책)으로 내는 길이 낫다고 느낍니다.


  더 깊이 말해 본다면, 도서관에 가서 한 벌 빌려서 읽고 돌려줄 만한 책이라면, 처음부터 아예 읽지 않아도 좋다고 느낍니다. 책이란 나무와 같아서, 나무그늘을 하루 누리고 베어버릴 만하지 않듯, 책도 한 벌 훑고서 다시 안 들출 만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곁에서 든든하면서 푸르게 바람을 베푸는 나무처럼, 언제나 곁에서 알뜰살뜰 이야기를 베풀 만한 책이 될 노릇이라고 느껴요.


  《성경의 형성사》(박창환, 대한기독교서회, 1969)하고 《암태도 소작쟁의》(박순동, 청년사, 1976)를 고르며 생각합니다. 아름드리숲이 되어 푸른바람을 일으키는 나무 못지않게, 마을에서는 장작을 때고 아궁이를 지필 나무도 있을 노릇입니다. 장작이라 해서 소모품이나 소비품은 아닙니다만, 나무로 불을 땐다면 재가 되어 흙으로 돌아가겠지요. 가만 보면 꽤 많은 책은 마치 ‘장작 같은’ 구실일 수 있겠어요. 불이 되어 주고서 흙으로 돌아갈 만한.


  《하루라도 웃지 않은 날은 망친 날이다》(김미화, 자유문학사, 1993)라는 책이 눈에 뜨입니다. ‘나의 출산 일기’를 보니 이런 이야기가 흐릅니다.


.. 영남 씨가 정말 밉고 원망스럽다. 친정에 와서 지낸 후로 일 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주말부분데, 그것도 잠깐 얼굴만 비치고 가기가 일쑤고, 내 어려움은 조금도 이해를 못하는 것 같다. 미운 사람! 자꾸 눈물이 난다. 남자들은 어쩜 그렇게 이기주의자들일까? 자기가 바라던 아기를 낳기 위해 이렇게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데, 아무 일도 않고 그냥 잘 먹고 잘 쉬고 있다고만 생각하는지 ..  (233쪽)


  몸으로 낳지 않으니 아기를 모르기도 하지만, 몸으로 돌보지 않으니 아기를 더더욱 모르기 마련입니다. 젖을 물리지도 않고, 기저귀를 갈지도 않고, 물을 떠먹이지도 않고, 하루 내내 어르고 안고 재우고 노래하고 뒹굴면서 눈맞춤을 하지 않는다면, 참말로 아기를 모르겠지요. 똥오줌을 가리도록 몇 해씩 곁에서 지켜보고, 아귀힘을 기르도록 잼잼을 비롯해 갖은 놀이를 시키고, 다리힘을 붙이도록 곁에서 북돋아 주는, 기나긴 날을 사랑으로 함께하지 않고서야, 사내뿐 아니라 가시내도 새로운 숨결에 깃든 어마어마한 빛을 모르기 마련입니다.


  그나저나 오늘도 차마 다 짊어질 수 없을 만큼 온갖 책을 고릅니다. “그런데 이 책들 다 어떻게 하시려나? 짊어지실 수 있나? 뭐, 요즘은 택배가 있으니까 부치면 되지. 참 좋아졌어, 세상 좋아졌지.” 〈뿌리서점〉 아저씨 말마따나 참말로 엄청나게 좋아진 온누리입니다. 택배가 있어 묵직한 책짐을 거뜬히 날라다 주기도 합니다만, 이제 책이란 살림을 누구나 홀가분히 누릴 수 있어요. 기껏 쉰 해 앞서까지만 해도 책을 느긋이 읽을 만한 사람은 참 드물었습니다. 백 해 앞서를 보자면 느긋이는커녕, 책을 아예 구경하기 어려웠고, 이백 해나 오백 해 앞서를 보자면 종이책이란 꿈도 꿀 수 없는 노릇입니다.


  종이책 읽는 사람이 너무 줄었다고들 하지만, 사람들은 처음부터 종이책을 읽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처음부터 숲책을, 숲이라고 하는 책을 읽었어요. 살림책을, 살림이라는 책을 읽었지요. 사랑책을, 사랑이라고 하는 책을 읽었어요. 사람책을, 사람이라고 하는 책을 읽었습니다. 따로 종이에 옮겨적지 않더라도 마음으로 새기면서 물려주거니 물려받거니 하는 마음책을 읽었어요.


  《나의 빨간 수첩에서》(미우라 아야코/박영 옮김, 자유문학사, 1988)를 더 골라 봅니다. 커다란 상자 하나에 담을 책은 택배로 맡기기로 합니다. 시골집으로 시외버스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읽을 책 두어 가지만 빼놓습니다.


.. “어머님, 이렇게 생각해 주셔서 정말로 고맙습니다.”라고 내가 말하자, 시어머니는 깜짝 놀랐다는 듯이 내 얼굴을 바라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얘야, 연약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란다.” ..  (67쪽)


.. 고급스러운 철도관사에 사는 친구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친구도 자기 방을 갖고 있었다. 아름다운 블라우스를 입은 채 파란 전기스탠드의 불빛을 받으며 공부하고 있는 친구의 모습을 창문에서 바라보았을 때, 나는 공주를 보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블라우스가 없었던 나는 학교에서는 물론이고 집안에서도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친구들의 생활이 부럽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 그 후에 전쟁이란 것이 한줌밖에 되지 않는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일어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수많은 생명과 재산이 그들의 희생물이 되어 빼앗긴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결코 가난한 사람이 많다는 게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돈 많은 사람들이 죄악을 저지른다는 사실만은 눈을 번뜩이며 지켜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언제부터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  (154∼155쪽)


.. 따뜻함이 없고서는 진실로 아름다운 말이라는 것이 전혀 있을 수 없다고 말해도 좋은 게 아닐까요? ..  (297쪽)


  미우라 아야코라는 일본 이웃은 어떤 마음이 되어 이러한 글을 써낼 수 있었나 하고 돌아봅니다. 여느 사람이 아니었겠지요. 마음자리에 깊이 새긴 생채기가 있으면서도 이를 포근히 돌볼 손길을 꿈꾼 마음으로 글줄을 여미었겠지요. 해묵은 책에 적힌 해묵은 옛날 옛적 모습을 옮긴 글이라지만, 외려 요즈막 쏟아지는 웬만한 책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사랑이 따사롭게 흐르는구나 싶습니다.


  새책집이 있어도 헌책집으로 일부러 찾아가는 뜻이라면, 누리책집이 있어도 기꺼이 품하고 찻삯을 들여서 헌책집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서 찾아가는 마음이라면, 어제하고 오늘을 가로지를 뿐 아니라, 이곳하고 저곳을 넘나드는 웅숭깊은 숨결을 함께할 수 있기 때문이지 싶어요. 가을에 가을스럽게 젖어드는 헌책집을 나서면서 〈뿌리서점〉 책지기님한테 꾸벅꾸벅 절을 합니다. 책지기 아저씨도 제가 모퉁이를 돌아설 때까지 손을 흔들어 줍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사전을 쓰는 사람.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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