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전국초등국어교과모임'에서 철마다 펴내는 책에 실으려고
쓴 글입니다. 지난 '봄호'에 실은 글을 이제서야 걸칩니다 ^^;;
가을호 글을 마무리지어 보내고서야 생각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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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디 사랑 ― 하나. 날씨
햇살·햇발·햇귀·햇볕
우리 곁님은 아이들이 삶하고 살림하고 사랑을 배우도록 어버이가 이끌거나 가르치려면 숲으로 우거진 멧골에서 보금자리를 가꾸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희는 멧골에서 보금자리를 짓는 꿈을 키우면서 시골에서 사는데, 해거름이 되고 난 고즈넉한 시골 밤하늘은 눈부시게 곱습니다. 읍내하고 15킬로미터 떨어지고, 뒤로는 멧자락이, 앞으로는 들이, 들 너머에는 다시 멧자락이 있으니, 또 관광지나 공장이나 고속도로나 기찻길이 없으니 하늘이 참으로 해맑아요. 저는 인천이란 고장에서 나고 자랐는데, 1980년대 첫무렵까지만 해도 인천 골목마을에서는 “눈부신 햇살”을 볼 수 있었고, 회오리바람이 지나간 뒤에는 “길다란 햇발”을 볼 수 있었으며, 소나기가 뿌린 다음에는 “무지개 곁에서 따사히 내리쬐는 햇볕”을 누릴 수 있었어요. 아침저녁을 누리고 밤낮을 보내는 터전에서 보는 하늘에 따라서 우리 살림이 달라지고, 이렇게 달라지는 살림에 맞추어 말도 다르기 마련입니다. 하늘에 티가 없어야, 새파랗게 보이도록 맑아야, 이때에 햇살을 제대로 느껴요. 햇살은 화살처럼 따갑게 쏘는 빛줄기예요. 그래서 “눈이 부시다”고, ‘눈부신’ 햇살이라고 합니다. “햇살이 따갑다”고도 해요. 짙은 구름 사이로 빛줄기가 길게 뻗으면 이때에는 ‘햇발’이지요. 하늘이 탁 트인 곳에서 지내면서 하늘바라기를 할 수 있어야 이런 낱말을 머리 아닌 몸으로 받아들여서 마음으로 새겨요. 높다란 집이 가로막지 않는 곳에서 새벽을 맞이하면, 어스름이 사라지며 환한 아침에 동이 트는 모습을 보며 ‘햇귀’를 느껴요. 집에서만 지내거나 자동차나 지하철에 오래도록 머무른다면 겨울에 포근한 ‘햇볕’을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해하고 얽힌 여러 낱말 ‘햇살·햇발·햇귀·햇볕’이란 예부터 하늘을 바라보고 바람을 맞이한 사람들이 알맞게 가다듬은 이름이라 할 수 있어요. 날씨를 읽는 뭇이름 가운데 하나이지요.
물폭탄·게릴라성 호우 → 함박비·벼락비
한때 ‘게릴라성 호우’란 말이 퍼졌으나 이제 거의 안 씁니다. 모르는 분이 많을 텐데, ‘게릴라성 호우’는 일본에서 건너온 이름입니다. 시나브로 ‘물폭탄’이란 이름으로 바꾸어서 쓰는데요, 누가 이런 이름을 지었을까요? 재미있다고 여기는 마음일까요? 가만히 생각해 봐요. 폭탄은 싸움말입니다. 싸워서 서로 죽이고 죽는 자리에서 쓰는 말이지요. 폭탄이 떨어져 몸이 갈가리 찢어지거나 목숨을 잃는 일이 재미있을까요? 이런 폭탄에 ‘물’을 더해서 ‘물폭탄’이란 낱말로 날씨를 가리키며 섣불리 써도 좋을까요? 우리는 예부터 ‘소나기·소낙비’라 했습니다. 이 말을 그대로 쓰면 되어요. 새말을 따로 지어야겠다 싶으면 벼락처럼 내리는 비라는 뜻으로 ‘벼락비’라 할 만합니다. 겨울에 쏟아지는 함박눈처럼 ‘함박비’란 이름을 지어도 어울려요.
쓰나미·해일 → 너울벼락·벼락너울
한동안 ‘해일’이라 하다가 ‘쓰나미’라는 말로 바뀌는 흐름이 있습니다.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인데, 한자말 ‘파도’는 ‘물결’을 뜻합니다. 물결이 매우 크거나 사나우면 ‘너울’이라 해요. ‘해일·쓰나미’가 아니어도 ‘너울’로 다 나타낼 만합니다. 따로 새말이 있어야 한다고 여기면 ‘너울벼락’이나 ‘벼락너울’처럼 느낌을 확 살려 볼 수 있어요. ㅅㄴㄹ
최종규(숲노래)
‘사전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리고, 한국말사전을 새로 쓰는 길을 걷는다. 《이오덕 마음 읽기》, 《우리말 글쓰기 사전》,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