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빛을 만나다 (2018.3.31.)

― 도쿄 진보초 Bohemoian's Guild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하룻밤을 즐거이 묵고서 일어났습니다. 일본은 어디를 가든 ‘작다’고 하는데, 하룻밤을 묵은 곳도 참 작습니다. 저처럼 등짐이며 어깨짐을 잔뜩 이고 지고 다니는 사람은 짐을 제대로 펼쳐 놓을 만한 자리가 없다고 할 만합니다. 이런 곳은 이런 곳대로 이런 멋이려니 여기면서 아침숨을 고릅니다.


  사진기를 챙기고 빈 등짐인 채 길손집을 나섭니다. 오늘 〈책거리〉에서 펼 이야기꽃에 앞서 진보초 책집을 여러 곳 들를 생각입니다. 눈부신 아침햇살을 느끼며 천천히 걷자니 맨 먼저 보이는 책집은 〈Bohemoian's Guild〉입니다. 책집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햇살 담긴 앞모습을 찰칵 찍습니다. 책집에 이런 이름을 붙이니, 꽤 멋스럽습니다. 떠도는 책이요, 떠도는 사람이면서, 떠도는 이야기입니다. 떠도는 마음이며, 떠도는 꿈이고, 떠도는 사랑입니다.


  책집으로 들어서려다 멈칫하며 바깥 책꽂이를 살핍니다. 바깥 책꽂이에는 좀 눅은 책을 내놓는다지만, 틀림없이 이곳에서 알짜가 있어요. 아니, 알짜 아닌 책이란 없지요. 어느 책은 저한테 알짜요, 어느 책은 이웃님한테 알짜입니다. 《山岳 第十五年 第一號》(高頭仁兵衛 엮음, 日本山岳會, 1920)라는 사진책을 집어듭니다. 1920년에 나온 산악모임 잡지입니다. 1920.8.28.이란 날을 어림해 봅니다. 저는 8월 28일이란 날을 늘 되새겨요. 이날 8월 28일은 제가 처음으로 책에 눈을 떴거든요. 1992년이었지요. 새삼스럽구나 싶어요. 일본 산악모임에는 눈길을 둘 일이 없으나 1920년에 나온 잡지와 이곳에 깃든 사진을 돌아보려고 고릅니다.


  《白馬岳》(塚本閤治, 山と溪谷社, ?)이란 사진책은 책자취가 떨어져나갔네요. 어느 해에 나왔는지 모르겠으나 ‘日本山岳會 寫眞書’라는 꾸러미로 나왔고, 1940년대 즈음 나온 책으로 어림해 봅니다. 머리말이나 이모저모 살피니 그렇습니다. 책자취는 떨어졌더라도 1940년대 조그마한 사진책이라니, 한국은 이무렵에 사진책을 펴낼 수 있었을까요? 아마 없지 않을까요?


  《山びこ學校》(無着成恭 엮음, 靑銅社, 1951)는 “山形縣 山元村 中學校生徒の生活記錄”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 책을 바탕으로 영화를 찍기도 했더군요. 1951.3.5. 한국으로서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나온 ‘멧골자락 작은학교 푸름이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갈무리한 교사가 있고, 이런 이야기를 눈여겨본 출판사가 있으며, 이런 이야기를 맞아들인 숱한 사람들이 있었네 하고 생각합니다. 모두 아름답게 어우러집니다.


  이제 책집으로 들어섭니다. 책집 왼쪽 벽에는 까만 웃옷 한 벌이 걸립니다. 무슨 옷인가 하고 바라보니 ‘책집 이름’을 새긴 옷입니다. 책집을 즐거이 다니는 저로서는 이 옷을 장만하고 싶습니다만, 이 마음을 꾹꾹 누릅니다. 책집에서 태어난 옷도 좋지만, 옷값보다는 책값을 쓸 생각이에요.


  《Emmet other's jug-band Christmas》(Russel Hoban·Lillian Hoban, parent's magazine press, 1971)를 고르고 《大德寺》(二川幸夫, 美術朮版社, 1961)를 고릅니다. 아, 二川幸夫라는 분이 빚은 사진책이 우리 책숲에 하나 있습니다. 《日本の民家》인데, 어쩜 이렇게 놀라운 사진책을 엮어냈나 싶었어요. 이녁이 엮은 다른 사진책을 만나니 반갑습니다. 절집을 담은 사진책도 훌륭합니다. 건축사진에서 내로라할 만한 결을 잘 보여주는구나 싶습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떨어져서, 고요한 사랑이 차분히 흐르다가도 샘물처럼 또르르 솟아나는 싱그러운 멋이 깃드는 사진입니다.


  《Philippine★Boxer》(佐藤ヒデキ, リトルモア, 1999)를 봅니다. 1999.8.10. 이 사진책을 낸 분은 《Korean Boxer》를 이다음으로 선보였습니다. 먼저 필리핀 권투선수를 찍었군요. 필리핀이라는 나라에서 스스로 ‘별’이 되어 집살림을 꾸리려고 하는 사람들 마음하고 삶을 사진으로 살뜰히 품습니다.


  《子ともたち》(Robert Doisneau, リブロボ-ト, 1992)는 1992.9.15. 첫벌이요, 제가 오늘 눈앞에서 손에 쥔 사진책은 1993.9.15. 세벌입니다. 한 해 사이에 두벌을 더 찍는군요. 일본이란 나라는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 사진책이라면 이렇게 알아보고 사읽는 손길이 있기에 사진누리가 든든하거나 넓구나 싶어요. 한국에서는 언제쯤 사진책이 사진으로 알뜰히 읽히면서 곱게 퍼질 만할까요. 예술이나 문화라는 사진책이 아닌, 삶하고 사랑이라는 사진책이, 여기에 노래요 살림이라는 사진책이 제대로 읽힐 날을 손꼽아 봅니다.


  《Robert Capa, 戰爭と平和》(Robert Capa, PPS通信社, 1984)를 들춥니다. 꽤 묵직하고 커다란 사진책이지만 《木村伊兵衛 寫眞全集 昭和時代 第二卷》(木村伊兵衛, 筑摩書房, 1984)을 지나칠 수 없습니다. 기무라 이헤이 님 사진책 하나를 일본에서 한국으로 들고 나르는 기쁨을 맛보아야지요. 이녁은 일본에 사진이 꽃피어나도록 일군 분입니다만, 일본에서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사진을 사진으로 바라보며 꽃이 되도록 북돋았다고 느낍니다. ‘기무라 이헤이 사진상’은 겉치레 이름이 아니라고 느껴요.


  책값을 셈하고서 책집지기한테 일본말로 여쭙니다. 도쿄 진보초 책집에 들를 때마다 물어보려고 수첩에 일본말로 적어 놓고 외웠으나, 막상 입을 떼려니 안 떠올라 수첩을 보며 읽습니다. “이곳을 사진으로 찍어도 될까요?” 하고 여쭙니다. 책집지기가 제 일본 말씨를 못 알아들으셔서 수첩을 건네어 보여줍니다. “아, 하이!” 하는 말이 돌아옵니다. 오오, 고맙습니다. “하이! 아리가또 고자이마스으!”


  〈Bohemoian's Guild〉 골마루를 새삼스레 다시 거닐며 사진책을 어루만지고 사진 하나 찰칵. 다시 사진책을 쓰다듬고 사진 둘 찰칵. 책집지기는 2층도 있으니 보라고 이야기하는데, 2층을 볼 겨를은 없습니다. 다른 책집을 들르고서 이야기꽃을 펴러 가야 하거든요. 사진책도 사진도, 또 사진에 흐르는 숨결도, 이 책집에 깃드는 햇살도 듬뿍 누리면서 아침을 열었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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